brunch

향신료의 여왕, 카다멈

고대 인도에서부터 중세 유럽과 바이킹의 항로에 이르기까지

by 이지현

후추가 향신료의 왕이라면, 카다멈은 단연코 향신료의 여왕이라 불린다. 사프란, 바닐라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 중 하나로 꼽히는 카다멈은, 그 고귀한 별명에 걸맞게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미각과 후각을 매혹해 왔다. 인도 남서부의 습한 숲 그늘에서 자라는 초록색 꼬투리는 껍질을 까는 순간 시트러스, 민트, 스파이스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폭발적인 향기를 뿜어낸다. 고대 문명에서 카다멈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신과의 소통을 돕는 향, 입 냄새를 제거하는 청결제, 그리고 소화를 돕는 약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이 식물은 아랍 상인들의 낙타 등을 타고 사막을 건너고, 바이킹의 배를 타고 북유럽의 차가운 바다를 건너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번 글에서는 카다멈이라는 이름 속에 숨겨진 언어학적 뿌리를 찾아보고, 고대 인도의 숲에서 시작하여 중세 유럽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이 향신료가 걸어온 길고 향기로운 여정을 알아본다.




심장을 지키는 향기

카다멈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고대 언어들 사이를 이동하며 그 형태와 의미가 조금씩 변화해 왔다. 그 이름 속에는 고대인들이 이 식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사용했는지가 담겨 있다.


산스크리트어 엘라 남인도의 푸른 보석

카다멈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엘라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인도 남서부, 특히 카다멈의 원산지인 카다멈 힐 지역에서 자생하는 소두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인도 문학이나 베다 경전에서 엘라는 향기롭고 귀한 식물로 묘사되며, 특히 남인도의 드라비다어족 언어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발음으로 불려 왔다. 이 단어는 카다멈이 단순히 수입된 외래종이 아니라, 인도 대륙의 생태계와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린 토착 식물임을 증명한다. 엘라라는 이름은 이후 식물학적 학명인 엘레타리아의 어원이 되며 그 정체성을 현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리스어 카르다모몬 어원의 재해석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카다멈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카르다모몬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의 구성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언어학적 논의가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이를 심장을 뜻하는 카르디아와 아모몬의 결합으로 보아, 카다멈이 소화 불량이나 가슴 통증을 완화하는 효능과 연관 짓기도 한다. 하지만 어원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십자화과 허브인 가든 크레스를 뜻하는 카르다몬(Kárdamon)과 동방의 향신료를 뜻하는 아모몬(Ámōmon)이 합쳐져 만들어진 복합어로 보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이름은 카다멈이 고대 서양인들에게 맵고 향기로운 동방의 귀한 식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유르베다와 신성한 공물

카다멈의 고향인 인도에서 이 향신료는 수천 년 전부터 의학과 종교, 그리고 일상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에게 카다멈은 숲이 준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아유르베다 의학 소화의 불을 지피다

인도의 전통 의학 아유르베다에서 카다멈은 매우 중요한 약재로 분류된다. 아유르베다 문헌에 따르면 카다멈은 체내의 아그니, 즉 소화의 불을 지펴 음식물을 잘 소화시키고 독소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또한, 세 가지 도샤의 균형을 맞추고 호흡기 질환을 완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기름지거나 무거운 음식을 먹은 후 소화를 돕기 위해 카다멈을 씹거나 차로 마시는 습관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인도의 건강 지혜이다. 카다멈은 약이자 음식으로서 인도인들의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신을 위한 공물과 왕족의 구강 청결제

고대 인도에서는 상류층이나 왕족들이 식사 후 구강 청결과 입 냄새 제거를 위해 카다멈 씨앗을 씹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카다멈 특유의 상쾌하고 강력한 향은 구취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힌두교 의식에서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나 신성한 불에 태우는 향료로도 사용되었다. 카다멈의 향기가 부정함을 씻어내고 신성한 기운을 불러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혼식과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도 카다멈이 든 음료나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축복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인도에서 출발한 카다멈은 무역로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문명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카다멈은 신비로운 동방의 향기이자 최고의 사치품으로 대접받았다.


이집트의 향과 치아 관리

고대 이집트인들은 향기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그들은 수입된 향신료를 신전 의식이나 미라 제작, 약용으로 다양하게 활용했다. 일부 문헌이나 재구성된 레시피에 따르면, 신전에서 태우는 복합 향인 키피나 미라 제작용 향료에 카다멈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한, 고대 의학 관련 파피루스나 전승에 따르면 이집트인들이 치아 건강과 입 냄새 제거를 위해 카다멈과 유사한 식물을 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향신료가 단순한 맛을 넘어 위생과 종교적 목적으로도 중요하게 쓰였음을 시사한다.


그리스 로마의 향수와 소화제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카다멈은 주로 향수의 원료이자 약재로 사용되었다. 로마인들은 카다멈의 향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기름에 침출시켜 몸에 바르거나 목욕물에 넣었다. 디오스코리데스와 같은 고대 식물학자들은 카다멈의 약용 가치에도 주목하여, 소화 불량, 복통, 기침 등을 치료하는 데 카다멈을 처방했다. 로마의 미식가 아피기우스의 요리책에도 카다멈을 사용한 레시피가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로마 상류층이 과식 후 소화를 돕고 음식의 풍미를 높이기 위해 이 비싼 향신료를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리아의 세관과 사치품의 상징

로마 제국 시대에 카다멈은 인도에서 홍해를 거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들어왔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카다멈은 고가의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높은 관세가 부과되었다고 한다. 이는 카다멈이 일반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필품이 아니라, 부유한 귀족이나 상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귀한 물품이었음을 방증한다. 로마인들에게 카다멈은 먼 동방에서 온 신비롭고 값비싼 보물이었으며, 이를 소비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와 권력, 그리고 세련된 취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중세 유럽과 바이킹 북유럽으로의 전파

중세 유럽에서 카다멈은 수도원 의학의 일부로 사용되었으나, 흥미롭게도 가장 열광적인 소비처는 지중해가 아닌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였다. 바이킹의 항해는 이 열대 향신료를 북쪽 끝으로 날랐다.


콘스탄티노플과 바이킹의 만남

바이킹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강들을 거슬러 올라가 흑해를 지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했다. 역사학자들은 바이킹들이 이곳에서 동방의 향신료들을 접하고 스칸디나비아로 가져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혹은 무어인이 지배하던 이베리아반도를 통한 교역로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어떤 경로였든, 이 열대 식물은 북유럽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세계적으로 카다멈 소비가 많은 지역이 된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의 베이킹 전통

북유럽으로 건너간 카다멈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향신료로 사랑받았다. 스웨덴의 카넬불레나 카르다뭄불레, 핀란드의 풀라 같은 빵과 과자에는 카다멈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북유럽의 가정에서는 빵 굽는 냄새와 함께 카다멈의 향기가 가득 퍼진다. 이는 바이킹 시대 혹은 중세부터 이어져 온 전통으로, 카다멈이 단순한 이국적인 향신료를 넘어 북유럽 식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중세 수도원의 약초와 만병통치약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고대 의학 지식을 계승하여 카다멈을 약초로 사용했다. 약제사들은 카다멈을 소화제, 구풍제, 기침약 등의 용도로 처방했다. 특히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 만든 만병통치약 성격의 복합 약물인 테리아크나 미트리다테의 레시피에도 카다멈이 포함된 예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카다멈이 몸을 따뜻하게 하고 소화를 도우며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비록 가격이 비싸 일반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쓰기는 힘들었지만, 질병 치료를 위한 귀한 약재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카다멈은 인도의 뜨겁고 습한 숲에서 태어나, 고대 문명의 신전을 거쳐 아랍의 커피잔 속에, 그리고 바이킹의 빵 반죽 속에 스며들었다. 산스크리트어 엘라에서 시작된 이름은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거쳐 전 세계인의 언어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단순한 식물을 넘어 각 문화권의 환대와 치유, 그리고 미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소화를 돕고 입안을 향기롭게 하며,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카다멈의 힘은 수천 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우리가 즐기는 카레의 깊은 맛이나 짜이 한 잔의 향기, 혹은 북유럽 빵의 달콤함 속에는, 고대부터 중세까지 인류가 사랑했던 이 향신료의 여왕이 걸어온 장대하고 향기로운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동방의 별, 스타아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