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물 쓰레기통 옆에서 멈춘 시간
회사를 퇴사한 후, 남편과 나는 가진 돈으로 생활을 이어가며 강사 교육에 몰두했다. 프로젝터와 스크린, 필요한 모든 장비를 들고 다니며 공간을 원데이로 빌려 교육을 진행했다. 그 절박함 속에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념했고, 우리의 노력은 곧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청년창업제도를 이용해 보증금을 마련했고, 한정적인 자금으로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우리의 공간을 직접 오픈했다. 떠돌이처럼 여기저기 공간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정감은 큰 위안이 되었다. 레슨과 원데이 교육을 진행하며 조금씩 우리의 일상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도자반 교육을 하러 가던 어느 아침이었다. 집에서 센터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늘 하던 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지만, 센터까지 100미터도 남기지 않은 거리에서 갑자기 몸이 굳어갔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틈도 없이 길가에 쓰러졌다. 주변은 음식물 쓰레기통 냄새로 가득했고, 그 냄새는 점점 나를 옥죄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감은 온몸을 휘감으며 나를 마비시켰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단순히 숨이 차오르는 것 이상의 공포였다. 공황발작은 내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길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나 자신은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늘 비상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가방 속, 주머니 속 어디에나 약이 있어야만 마음이 놓였다. 약을 들고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공황발작은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강의 도중에도, 길을 걷다가도,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불안감에 몸은 긴장으로 굳어지고 숨이 막히곤 했다.
하지만 약을 삼키고 나면 몇 분 안에 증상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몇 분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약 덕분에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비상약에 의지하며 버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것이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지만, 내 일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버팀목이었다. 약을 들고 다니는 동안, 나는 마치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나를 보호하는 방패를 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약에 의존하는 나 자신을 바라볼 때면, 어디까지 이 상태가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끊이지 않았다. 약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 불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날그날을 살아내는 것이었고, 나는 그 힘듦을 견뎌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