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페퍼의 역사

안데스의 붉은 보석, 매혹적인 향기의 여정

by 이지현

후추는 검고 맵다는 통념을 깨뜨리는 붉은 열매가 있다. 핑크페퍼는 이름에 페퍼가 들어가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검은 후추(Piper nigrum)와는 식물학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옻나무과 식물이다. 안데스산맥의 건조한 고원에서 자라나는 이 나무는 잉카 제국의 영광과 함께해 온 신성한 존재이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향수 산업과 미식 세계를 매혹시킨 화려한 조연으로 자리 잡았다. 겉모습은 후추와 닮았으나 그 속에는 매운맛 대신 달콤하고 스파이시한 송진 향과 장미 뉘앙스가 숨어 있어, 독자적인 향신료의 영역을 구축한 식물이다.

대중적으로 핑크페퍼는 요리의 색감을 살려주는 장식용 향신료 정도로 인식되거나,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주의사항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은 붉은 열매에는 고대 원주민들이 옥수수 맥주를 빚던 지혜와, 스페인 정복자들이 본국으로 가져가 관상수로 심었던 대항해 시대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핑크페퍼의 어원적 기원부터 잉카의 제단과 유럽의 정원, 그리고 현대의 관능적인 향수병 속에 담기기까지 이 매혹적인 열매가 걸어온 여정을 상세히 알아본다.




몰레와 핑크페퍼

핑크페퍼 이름의 유래와 초기 인식

핑크페퍼라는 이름은 열매의 외형과 색깔에서 직관적으로 유래했다. 붉은색을 띠면서 알갱이 형태가 후추와 흡사하여 붙여진 상업적 명칭이다. 식물학적으로는 전혀 다른 종이지만, 매콤한 향과 요리에 뿌려 먹는 용도가 비슷하여 페퍼라는 이름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초기 유럽 식물학자들은 이 열매를 야생 후추라 부르며 진정한 후추와 구별하려 했다.


몰레라는 토착 명칭의 배경

핑크페퍼의 원산지인 페루와 안데스 지역의 원주민들은 이 나무를 몰레(Molle) 혹은 물리(Mulli)라고 불렀다. 잉카인들이 사용하던 케추아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특정 나무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다. 학명인 Schinus molle에서 종소명 몰레가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린네는 이 식물을 분류하면서 원주민들의 토착 명칭을 그대로 학명에 반영했다.


지역적 명칭과 고유한 정체성

프랑스 향수 산업에서는 핑크페퍼를 베이 로즈(Baies roses)라 부른다. 직역하면 분홍 열매라는 뜻이지만, 향수 업계에서는 장미 향과 섞였을 때 시너지를 내는 고급 원료라는 정체성을 가진다. 미국 캘리포니아나 플로리다 등지에서는 가로수로 널리 심어지며 캘리포니아 페퍼 트리 혹은 브라질리안 페퍼 트리라고 불린다. 원산지에 따라 페루비안 핑크페퍼(Schinus molle)와 브라질리안 핑크페퍼(Schinus terebinthifolia)로 나뉘는데, 두 종 모두 핑크페퍼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지만 미묘한 향과 생태적 특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핑크페퍼의 역사와 삶

고대 잉카 문명의 의식과 활용

잉카 제국에서 핑크페퍼 나무(몰레)는 신성한 식물로 추앙받았다. 잉카인들은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몰레 나무를 태워 향을 피웠으며, 그 연기가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고 믿었다. 왕실의 정원이나 신전 주변에 이 나무를 심어 성역을 표시했다. 몰레 나무의 잎과 열매는 잉카의 미라를 방부 처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영적인 도구로 활용되었다.


초기의 식문화와 치차 음료

핑크페퍼 열매의 당분은 고대 안데스인들에게 중요한 감미료이자 발효원이었다. 그들은 잘 익은 핑크페퍼 열매를 물에 담가 발효시켜 치차 데 몰레(Chicha de Molle)라는 전통주를 만들었다. 옥수수로 만든 치차와 더불어 핑크페퍼로 만든 치차는 축제와 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음료였다. 알코올 도수가 낮고 상큼한 맛이 나는 이 음료는 척박한 고산 지대에서 원주민들의 갈증을 해소하고 에너지를 보충해 주는 활력소 역할을 했다.


민간요법과 치유의 도구

안데스 전통 의학에서 핑크페퍼 나무는 만병통치약에 가까웠다. 나무껍질과 잎에서 나오는 하얀 수액은 상처를 소독하고 감염을 막는 천연 연고로 쓰였다. 잎을 끓인 물은 류머티즘 관절염이나 근육통을 완화하는 목욕물로 사용되었으며, 열매는 이뇨 작용을 돕고 소화 불량을 치료하는 약재로 처방되었다. 특히 나무의 수지는 치통을 멎게 하는 효과가 있어 치통 나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외부 세계로의 전파와 이동

스페인 정복자들을 통한 발견과 이동

16세기 잉카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곳곳에서 자라는 핑크페퍼 나무의 아름다움과 유용성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 나무가 후추와 비슷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고, 본국인 스페인으로 종자를 가져가 심었다. 그러나 유럽의 기후에서는 후추만큼의 상업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대신 우아하게 늘어지는 가지와 붉은 열매의 관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정원수나 가로수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북미와 온대 지역에서의 초기 반응

핑크페퍼는 19세기경 북미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의 따뜻한 기후는 핑크페퍼가 자라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캘리포니아 미션(선교원) 주변에 이 나무를 심으면서 캘리포니아 페퍼 트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초기에는 그늘을 제공하고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조경수로서 환영받았으며, 건조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강인함 덕분에 서부 개척 시대의 마을 풍경을 형성하는 주요 수종이 되었다.


대중화 과정과 침입종으로서의 논란

관상수로 인기를 끌던 핑크페퍼는 강한 번식력 때문에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특히 플로리다 지역에서는 브라질리안 핑크페퍼가 토종 식물의 서식지를 잠식하며 맹렬히 번식하여 플로리다의 잡초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새들이 열매를 먹고 씨앗을 퍼뜨리는 탓에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핑크페퍼의 확산 역사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도입된 식물이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고 때로는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태학적 사례가 되었다.




핑크페퍼 생태적 특성과 환경

자생지의 기후와 토양 조건

핑크페퍼의 원종인 페루비안 핑크페퍼(Schinus molle)는 안데스산맥의 건조하고 높은 고지대에서 자생한다. 척박한 토양과 부족한 강수량, 강한 자외선을 견디며 진화했기에 가뭄에 매우 강하다. 반면 브라질리안 핑크페퍼(Schinus terebinthifolia)는 좀 더 습하고 따뜻한 저지대를 선호한다. 두 종 모두 옻나무과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영양분이 없는 땅에서도 뿌리를 깊게 내리고 생존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번식과 자웅이주의 생태적 비밀

핑크페퍼 나무는 암수가 딴 그루인 자웅이주 식물이다. 암나무에서만 붉은 열매가 맺히며, 수분은 주로 곤충에 의해 이루어진다. 열매는 겉껍질이 얇고 부서지기 쉬우며, 그 안에 단단한 씨앗이 들어 있다. 식물은 새들을 유인하기 위해 열매를 붉고 화려하게 만들었으며, 씨앗은 소화되지 않고 배설되어 멀리 퍼져나가도록 진화했다. 잎을 비비면 강한 향이 나는데, 이는 초식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화학적 방어 체계이다.


성분 분석과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

핑크페퍼 열매에는 펠란드렌(Phellandrene), 피넨(Pinene), 리모넨(Limonene) 등의 정유 성분이 풍부하다. 이 성분들이 핑크페퍼 특유의 송진 향과 시트러스 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핑크페퍼는 옻나무과(Anacardiaceae)에 속하므로, 캐슈너트나 망고, 옻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교차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독성은 없지만 과다 섭취 시 위장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보호와 정화의 붉은 열매

잉카의 전설과 생명의 나무

잉카 전설에 따르면 몰레 나무는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최초의 나무 중 하나라고 한다. 대기근이 들었을 때 몰레 나무의 열매로 음료를 만들어 굶주림을 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때문에 원주민들은 몰레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으며, 나무 아래에 제물을 바치고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붉게 익은 열매는 태양의 에너지가 응축된 것으로 여겨져 생명력의 상징이 되었다.


안데스 지역의 액막이 풍습

안데스 산간 마을에서는 핑크페퍼 가지를 꺾어 집 입구에 걸어두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풍습이 있다. 강한 향기가 악령이나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악한 눈(Evil Eye)으로부터 어린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핑크페퍼 잎으로 아이의 몸을 문지르는 의식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는 핑크페퍼가 단순한 식물을 넘어 영적인 보호자로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향수 산업의 베이 로즈(Baies Roses)

현대 향수 산업에서 핑크페퍼는 가장 인기 있는 탑 노트 재료 중 하나이다. 베이 로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샤넬, 에르메스, 딥티크 등 유명 브랜드의 향수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핑크페퍼의 향은 신선하면서도 스파이시하고, 동시에 장미와 같은 플로럴 뉘앙스를 풍겨 향수에 세련된 활기를 불어넣는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중성적인 매력 덕분에 남녀 공용 향수나 니치 향수에서 특히 선호된다.




핑크페퍼의 역사는 안데스의 고원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인의 식탁과 화장대 위에 안착한 성공적인 이주의 서사이다. 잉카인들의 신성한 나무였던 몰레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관상수가 되었고, 다시 현대의 과학과 예술을 만나 미식과 향수의 핵심 재료로 거듭났다. 후추와 닮은 외형으로 주목받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붉은 보석의 지위를 획득하며 완성되었다.

비록 식물학적으로는 후추가 아닐지라도, 핑크페퍼가 인류에게 제공한 풍미와 영감은 진짜 후추 못지않게 강렬하다. 척박한 땅을 붉게 물들이며 자라난 그 생명력과, 톡 터질 때 퍼지는 매혹적인 향기는 우리에게 겉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본연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핑크페퍼는 단순한 향신료를 넘어, 고대의 신화와 현대의 감각을 이어주는 향기로운 매개체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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