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보석이라 불리는 카시스 베리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짙은 보랏빛 보석이라 불리는 카시스 베리는 독특한 향기와 강렬한 산미를 지닌 까치밥나무과 식물이다. 영어권에서는 블랙커런트라 불리며, 겉모습은 블루베리와 흡사해 보이지만 그 맛과 향의 깊이는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블루베리가 부드러운 단맛을 낸다면, 카시스는 톡 쏘는 듯한 야생의 산미와 잎사귀에서 배어 나오는 쌉싸름한 풀 냄새, 그리고 동물적인 뉘앙스까지 품고 있는 복합적인 과일이다.
한때 미국에서는 소나무 숲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재배가 전면 금지되어 금지된 과일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중세 수도사들의 만병통치약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부족한 비타민 C를 공급해 준 영국인들의 생명줄이었다. 오늘날 카시스는 칵테일 키르 로얄의 붉은 심장이자, 니치 향수 산업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린 노트의 원료로 자리 잡았다.
카시스의 학명은 Ribes nigrum이다. 여기서 속명인 리베스(Ribes)는 본래 아랍어 리바스(Ribas)에서 유래했다. 흥미로운 점은 아랍인들이 말한 리바스는 카시스가 아니라 신맛이 나는 대황(Rhubarb)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이다. 8세기 무렵 스페인을 점령한 무어인들이 자신들이 즐겨 먹던 대황을 찾지 못하자, 그와 비슷한 신맛을 내는 까치밥나무 열매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했다.
커런트와 코린트의 언어적 연결고리
영어 명칭인 블랙커런트(Blackcurrant)에서 커런트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코린트(Corinth)에서 기원했다. 중세 유럽인들은 동방에서 수입되던 작고 검은 건포도를 코린트의 포도(Raisins of Corinth)라 불렀다. 북유럽의 숲에서 발견된 카시스 열매가 이 건포도와 생김새가 비슷하다 하여 코린트가 변형된 커런트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열매를 카시스(Cassis)라 부른다. 16세기 프랑스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이 단어는 라틴어 카시아(Cassia)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정확한 어원은 불분명하다. 프랑스, 특히 부르고뉴 지방에서 이 열매를 이용한 리큐어 산업이 발달하면서 카시스는 단순한 식물명을 넘어 고급 식재료와 리큐어를 통칭하는 고유명사처럼 전 세계에 각인되었다.
카시스는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가 아닌, 북유럽과 시베리아의 춥고 습한 숲을 고향으로 삼는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문헌에 카시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이유는 이 식물이 그들의 생활 반경 밖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의 원주민들은 척박한 겨울을 나기 위해 숲속의 야생 카시스를 채취했다.
12세기경, 카시스는 북유럽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같은 성녀이자 약초학자들은 카시스를 통풍, 류머티즘, 그리고 인후염 치료에 사용했다. 잎을 달인 물은 해열제로 쓰였고, 열매는 피로 회복제로 활용되었다. 수도사들은 이 식물을 만병통치약에 가까운 신비로운 존재로 기록했으며, 수도원의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영국과 유럽 민간에서는 카시스를 퀸지 베리(Quinsy berry)라고 불렀다. 퀸지는 편도선 주위에 고름이 차는 병인 편도주위농양을 뜻한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 카시스 열매와 잎으로 만든 시럽은 목의 염증을 가라앉히는 탁월한 치료제였다. 잎을 으깨어 상처에 바르거나, 열매즙을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 방식은 유럽 가정의 상비약이자 할머니의 지혜로 전해져 내려왔다.
카시스는 서늘한 기후와 비옥하고 습기 있는 토양을 선호한다. 특히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석회질 토양과 서늘한 여름은 카시스 특유의 향을 응축시키는 최적의 테루아를 제공한다. 겨울의 추위는 식물이 휴면기를 거치며 다음 해의 결실을 준비하는 데 필수적이다. 더위에 약해 한국이나 일본의 고온 다습한 여름에는 생육이 어려운 편이며, 일교차가 클수록 껍질의 색소와 당도가 짙어진다.
카시스 잎과 줄기를 비비면 고양이 오줌 냄새와 비슷한 톡 쏘는 향이 난다. 이는 곤충이나 초식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화학적 방어 기제이다. 이 향기의 정체는 티올(Thiol) 계열의 화합물이다. 농도가 짙을 때는 불쾌할 수 있으나, 극도로 희석되면 싱그러운 풀 내음과 달콤한 과일 향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반전 매력은 조향사들에게 영감을 주는 핵심적인 생태적 특징이다.
초기 정착민들에 의해 북미 대륙으로 건너간 카시스는 20세기 초반까지 널리 재배되었다. 그러나 1911년, 미국 정부는 카시스 재배를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카시스 나무가 미국 목재 산업의 핵심인 스트로브잣나무(White Pine)를 말라 죽게 하는 털녹병(Blister Rust)의 중간 숙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연방 요원들이 농가를 돌며 카시스 나무를 베어내고 불태웠으며, 이로 인해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카시스는 수십 년간 잊힌 금지된 과일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카시스 사랑
미국에서 사라져 갈 때, 영국에서는 카시스가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유보트 공격으로 오렌지와 같은 비타민 C 공급원의 수입이 끊기자, 영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잘 자라는 카시스 재배를 적극 장려했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카시스 시럽(Ribena)이 무료로 배급되었으며, 이 시기의 경험은 영국인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카시스를 사랑하는 민족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부르고뉴의 디종(Dijon) 시장이었던 펠릭스 키르(Félix Kir)는 카시스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는 지역 특산물인 알리고떼 와인의 신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달콤한 카시스 리큐어인 크렘 드 카시스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을 고안했다. 이것이 바로 키르(Kir)이며, 샴페인에 섞으면 키르 로얄이 된다.
향수 산업에서 카시스는 열매보다 꽃봉오리(Bud)가 더 귀하게 대접받는다. 부르종 드 카시스(Bourgeons de Cassis)라 불리는 이 원료는 향수에 깊이와 입체감을 부여한다. 달콤하면서도 동시에 쌉싸름하고, 동물적인 관능미까지 갖춘 이 향은 롬브르 단 로(LOmbre dans LEau)와 같은 니치 향수의 핵심 노트로 쓰인다.
카시스의 역사는 척박한 북쪽 숲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인의 미각과 후각을 사로잡기까지의 긴 여정이다. 미국에서는 금지된 잡목으로, 유럽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약초로, 그리고 현대에는 가장 세련된 향기와 맛의 상징으로 그 위상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극적으로 변화해 왔다. 겉보기에는 작고 검은 열매일 뿐이지만, 그 안에는 숲의 야생성과 인간의 문화사가 짙게 농축되어 있다.
우리가 칵테일 한 잔에서, 혹은 스치는 향수 냄새에서 카시스를 마주할 때 느끼는 감각은 수천 년을 이어온 자연의 생명력이다. 달콤함 뒤에 숨겨진 쌉싸름함, 화려함 속에 감춰진 흙냄새는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단순하지 않고 입체적임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