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페퍼가 증명하는 수(水)의 영속성
바닥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졌을 때, 혹은 차갑게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데울 강렬한 자극이 필요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싸하고 매운 향기를 찾곤 한다. 작고 단단한 열매껍질을 부술 때 훅 찌르고 들어오는 블랙페퍼의 뜨거운 숨결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감각을 흔들어 깨워 준다.
오행의 순환에서 수(水)는 저장하고 응축하는 에너지다. 모든 생명 활동을 멈춘 듯 고요한 겨울의 땅속에서 다음 봄을 기약하며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는 깊고 은밀한 힘을 상징한다. 오행아로마 향기로 세우는 삶의 축, 그 마지막 여정은 생명의 정수를 압축하여 보존하는 씨앗, 블랙페퍼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동양 철학에서 물의 성질을 윤하(潤下)라 표현한다. 적실 윤과 아래 하가 합쳐진 이 말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만물을 촉촉하게 적시고 생명을 잉태하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의미한다.
씨앗이 땅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뿌리를 내릴 준비를 하는 과정은 물의 순환과 철저히 닮아 있다. 작고 새까만 블랙페퍼의 열매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발적인 열기와 매운맛이 응축되어 있다. 요란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대신 가장 깊고 어두운 곳으로 침잠하여, 때가 오기를 묵묵히 기다리며 에너지를 축적한다.
이러한 생존 방식은 블랙페퍼의 향기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첫 향은 톡 쏘는 강렬함으로 다가오지만, 그 안에는 깊은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원초적인 생명력이 자리한다. 강인함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껍질 속에 얼마나 밀도 높은 에너지를 품고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블랙페퍼는 그 향기로 묵묵히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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