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오리진 스토리
스레드의 자기소개, 링크드인의 한 줄 소개, 혹은 누군가와의 첫 만남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까지, 우리는 늘 스스로를 정의하며 살아간다. 살아온 여정, 축적된 경험, 관심사와 기술을 요약해 나를 증명하는 자격이나 타이틀로 보여준다. BS, PhD, M.Arch, MBA, CEO, COO, AIA, CPA, JD… 긴 시간 학위를 위해 공부하고, 전문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이 단어들이 가진 진정한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회사 명함 속 자리와 그 안에서의 성장만을 쫓아왔던 내가 이제야 현실을 직면하며, 그 틀을 깨고 나가려는 작은 몸부림인지, 아니면 새로운 통찰인지 모르겠다.
아이덴티티.
대학원 시절, 경영대 MBA 지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지원서 첫 질문이 “당신을 한마디로 소개해보세요”였고, 그 질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지금도 궁금하다. 세계적인 인재들을 모은다는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으니까. 그때도 지금도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대체로 나의 학력, 영국에서 공부했고 예일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건축을 한다고 답할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요즘은 어느 회사에서 일한다는 말이 더해졌을 뿐이다. 내 열정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그냥 정해진 길만 따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내가 누구인지, 뿌리내린 땅이 어디인지조차 몰랐던 것 같다. 실리콘밸리로 오면서 주변의 영향에 많이 휘둘리고, 연봉이나 회사 이름으로 나 자신을 비교하게 된 이유도,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의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의 고리를 끊게 해 준 건 최근의 아주 작은 계기였던 것 같다. 같이 MBA 수업을 들으며 만났던 형과의 이야기다. 우리는 각자 건축대학원과 보건대학원에서 재학 중이었고, 경영대 수업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꿈과 추진력은 남다른 것이 느껴졌고, 지금은 장학재단까지 설립한 모습을 보며 항상 영감을 받는다. 우습게도, 그 인연을 통해 나에게 자문위원을 부탁하던 그 모습에서, 그는 변함없이 과감히 꿈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예일 한인학생회장이었던 내 작은 이력을 믿고 수락했지만, 최근 재단의 모임에서 그동안 나를 갉아왔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인사이트를 얻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건축가입니다. “
변호사, 박사, 간호사, 교수, 음악가 등 다양한 젊은 리더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이 한마디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었던 것 같다. 일상 속 익숙한 일들, 익숙한 전문 집단에서 나를 정의하는 것은 주어진 프로젝트의 단상, 아이디어, 혹은 생산성. 또 테크 기업들이 가득한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저는 이러이러한 건축회사를 다녀요”라고 스스로를 홍보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던 나 자신이 어쩌면 우습기도 했었건만, 그 한마디로 내가 걸어온 길을 정의하게 되면서, 오롯이 세상 속에서 나라는 개인의 브랜드를 정립하게 되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물론 글과 머릿속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다시금 내가 왜 건축을 하려고 했는지, 그 열정이 무엇인지 되새기며 느낀 순간이었다.
Nizam Uddin은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 예일에 방문한 World Fellow였으며, 영국 왕실의 재단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다. 지금도 그는 다양한 문화 정책 분야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이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liaison으로 학기 동안 교류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와의 대화가 요즘 많이 생각난다. 그와 카페에 앉아 미래에 대한 목표와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는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 있다. “What is your first memory about city and architecture?” 특별하거나 각색된 이야기가 아닌, 내가 느꼈던 업에 대한 첫 기억. 그는 그것을 듣고 싶어 했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어릴 적 나는 몇 번이나 미아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 생신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한강 유람선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그만 선착장에서 먼저 내려버렸다. 반나절 넘게 한강을 헤매며 울고 있었고, 그때 나를 찾아준 안전요원과 부모님이 달려오는 장면이 선명하다. 또, 버스 종점에서 길을 잃고 밤늦게까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일도 있었고, 공항에서 길을 잃어 헤매던 순간도 생생하다. 익숙한 도심 속에서 모든 거리가, 모든 장소가 비슷하게 보였던 경험은 지금도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과 지도 앱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때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그때 내가 겪었던 그 불안과 혼란을 지금의 나도 이해할 수 있다.
이 경험은 나에게 도시와 건축 공간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설계하는 공간은 단지 ‘지나가는 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목적지까지의 여정을 명확히 인식하게 하고, 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We shape architecture, architecture shapes us.” 건축은 단순히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너는 누구세요?
누군가 나에게 “건축가로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건축은 도시에서 이정표가 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두 가지 중요한 과정은, 첫째, 도시 개발을 이끌어 사회적 책임과 경제적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이며, 이게 결국 도시 개발 재단을 만드는 꿈이 아닐까 싶다. 둘째, 건축가들이 단순히 설계를 넘어서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나는 초고층 건축을 다루는 SOM으로 이직했다. 초고층 건축은 건축, 개발, 미학, 사업이 얽힌 복합적 분야로, 이곳에서의 경험은 건축과 개발의 역학을 깊이 이해하며, 더 큰 도시적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데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시작이다. 현재는 실리콘밸리의 마이너리티이자 건축가로서, 그 기반 위에 더 많은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