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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설계회사의 하루 (1)

by 정현재

바쁜 아침이다. 멈춰있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듯, 작년 겨울에 중단된 프로젝트들이 한꺼번에 움직인다. 오늘은 클라이언트와 변호사와의 미팅이 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오래된 소방서를 철거하고 프라임 오피스와 호텔을 신축하는 동시에, 인접 부지에는 새로운 소방서를 계획하는 대규모 개발 사업이다. 이번 긴급 미팅이 잡힌 이유는 바로 옆 부지의 건물이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어 시 공무원들의 비교 검토를 위한 대체안을 제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 주 동안 계획에도 없던 대체안을 마련해야 했고, 나는 프로젝트에 새로 합류한 팀원으로서 기존 설계안을 빠르게 파악하고 디자인 디렉터와 대체안 방향을 결정했으며, 클라이언트를 위한 리포트 준비에도 매달렸다. 게다가 건물의 바람 영향을 테스트하는 자료도 준비해야 했다. 연말 전에 클라이언트 본사에서 파사드 디자인 변경을 요청했기 때문에 중요한 디자인 미팅을 위해 여러 가지 제안도 함께 검토했다.


혼자서 디자인 프린시펄과 직접 소통하며 다양한 과업을 맡아야 했기에, 클라이언트 측 주요 결정권자들과의 미팅에도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클라이언트와의 중요한 미팅일수록 프로젝트 주도권은 파트너나 프린시펄에게 있으며, 디렉터조차 청취자의 입장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미팅에서는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서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과 배경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특히 미국의 고층 건물 개발 사업은 단순한 건축을 넘어선 종합 예술이다. 개발사는 공공 기관, 시 정부, 금융가들과 보이지 않는 치열한 협상과 조율을 거치며, 때로는 인근 건물 소유자들과 협상하거나 언론 플레이를 활용하기도 한다. 설계자는 이러한 복잡한 요구와 필요 사항을 반영해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해결사이자 조율자다. 미팅 중 주고받는 대화는 프로젝트 전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며, 성공적인 결과는 이해관계자의 역학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해진다.


전날은 평소보다 더 많은 미팅에 참여해서인지 기분이 약간 고양되고 즐거운 하루였다. 오후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하나의 이메일이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변호사로부터 온 이메일은 단순했다. 우리가 제안한 대체안과 기본 안을 정리한 테이블을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사실 설계를 하다 보면 주로 선과 삼차원 모델을 다루며 디자인 검토에 집중하지만, 기획 단계에서는 글과 숫자가 더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이 숫자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로 수많은 법적, 경제적, 기술적, 그리고 예술적 정보가 집약된 설계 도면에서 비롯된다. 특히 이번 대체안들은 기존 설계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설계 조각들을 끌어와 조합한 것이다. 그래서 숫자는 현실과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가상의 시나리오에 가깝다. 예를 들어, 건물의 외관만 보존할 것인지, 전체 철거 후 재건축할 것인지, 기존 설계안에 프로그램을 추가해 변화를 줄 것인지 등 다양한 옵션을 시뮬레이션해야 했다.


문제는 시에서 요구하는 자료가 예상보다 더 세밀하고 구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조합해 낸 대체안이 단순한 개념적 제안에 그치지 않고, 실현 가능성까지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디자인 작업은 선과 면을 다루는 시각적 과정에서 법적·정책적 해석과 수치적 근거를 포함하는 종합적 검토로 확장되었다. 초고층 건축 설계뿐 아니라 다양한 중·대형 프로젝트에서 허가 및 승인 과정은 복잡하고 까다롭다. 지역과 구역, 특수하게 지정된 개발 지구 등 다층적인 규제 체계가 작용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지역 담당자들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프로젝트가 한 달, 두 달씩 지연되는 것도 그들의 재량에 달려 있으며, 그로 인한 비용과 손실은 고스란히 클라이언트가 부담하게 된다. 특히, 현재처럼 역사 보존위원회가 개입된 경우,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 자료가 부족하니 다시 제출하시오”라는 한 문장만으로도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달하는 프로젝트가 전면 재검토 또는 중단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위기감과 책임의 무게는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이메일 한 줄에 불과하다. 그 중대함을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디렉터와 사장들 정도일 것이다. 시놉시스가 길어졌지만,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디렉터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숫자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기 시작했다. 지상과 지하 면적만 계산할 것인지, 2021년도 설계안과 2024년도 수정안의 차이를 어디까지 적용할 것인지, 보전을 위한 프로그램 변경 범위는 어디까지 포함할 것인지—이 모든 항목을 세세하게 검토해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업이 명확하게 느껴졌지만, 이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디렉터는 사소한 부분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검토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번 태스크를 내가 주도적으로 정리하고 준비했던 터라, 본인이 이해해야 할 두 번째 과정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디렉터는 다음 날 아침 9시에 변호사, 클라이언트, 실무진이 모두 참석하는 긴급 미팅을 잡았다. 그런데 그 상태 그대로 클라이언트 및 실무진과 소통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지친 머리를 카페인으로 붙잡은 채, 그날 밤늦게까지 코멘트들을 정리하고 프레젠터블한 자료로 다듬고 재구성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결과물만큼은 완벽하게 만들어야 했다. 결국 새벽까지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미팅에 들어가게 되었다. 보통 설계 실무 미팅은 줌(Zoom)을 통해 원격으로 진행되는데, 변호사도 합리적인 사람이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클라이언트 측에서는 며칠 전 전체 회의부터 처음 참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상세한 질문을 던졌다. 미팅이 끝난 후 찾아보니, 그 사람은 새롭게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시니어 VP였다. 프로젝트의 방향과 주요 결정에 깊숙이 관여할 핵심 인물이 추가된 셈이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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