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터는 다음 날 아침 9시에 변호사, 클라이언트, 실무진이 모두 참석하는 긴급 미팅을 잡았다. 그런데 그 상태 그대로 클라이언트 및 실무진과 소통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지친 머리를 카페인으로 붙잡은 채, 그날 밤늦게까지 코멘트들을 정리하고 프레젠터블한 자료로 다듬고 재구성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결과물만큼은 완벽하게 만들어야 했다. 결국 새벽까지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미팅에 들어가게 되었다. 보통 설계 실무 미팅은 줌(Zoom)을 통해 원격으로 진행되는데, 변호사도 합리적인 사람이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클라이언트 측에서는 며칠 전 전체 회의부터 처음 참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상세한 질문을 던졌다. 미팅이 끝난 후 찾아보니, 그 사람은 새롭게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시니어 VP였다. 프로젝트의 방향과 주요 결정에 깊숙이 관여할 핵심 인물이 추가된 셈이었다.
검토의 주요 쟁점은 대체 전략에 따른 오피스 면적 변화와 주차 대수의 확인이었다. 다행히도 인접 건물 보존으로 인해 프로그램이 일부 변경되었음에도 계획 면적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주차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였다. 코어부 이동과 진입 동선 변경으로 인해 주차 면적은 변함없었지만, 비효율적인 배치로 인해 수용 대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펜슬 아웃(pencil out) 작업을 통해 세부 수치와 배치 근거를 마련해 명확히 소통했던 점이 성과로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숫자를 계산하고 근거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분석하는 일을 즐기는 편이다. 아마도 이는 과거 자산운용사에서의 경험(엑셀로 설계안을 수치화했던 경험)과 디벨로퍼에 대한 개인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 같다.
나는 현재 예외적으로 동시에 5-6개의 규모 검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주로 미국 내 디벨로퍼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사장과의 업무 연속성이 형성된 덕분일 것이다. 오늘은 샌프란시스코, 내일은 샌디에이고, 그다음 날은 시애틀의 대지를 분석하며, 각 지역의 특성과 시장 요구를 반영하는 작업은 색다른 재미를 준다. 그러나 반대로, 장기적으로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고유한 프로젝트가 부재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빠르게 변화하는 프로젝트와 끊임없는 규모 검토 작업은 설계자로서의 깊이를 쌓기보다 결과 중심의 업무 사이클을 반복하게 만든다. 특히 코로나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지역의 설계 시장과 디벨로퍼들의 주요 관심사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부동산 시장의 우선순위를 재편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서의 전략적 판단과 시장 적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미국 설계회사의 하루
각설하고, 설계회사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 글로 풀어쓰면 길고 복잡한 여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디자인 검토와 클라이언트 미팅은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몇 시간 내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진다. 설계회사에 있다 보면 24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오늘 조명한 프로젝트의 경우,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몇 주 전 클라이언트 매니지먼트와의 고위급 디자인 미팅에 참여했을 때 들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떠오른다. 사회적으로 저명한 경쟁사 대표의 의도적인 견제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 회의나, 클라이언트 내부 정치로 인한 설계 방향의 급격한 변화 등 상층부의 미묘한 역학 관계 속에서 프로젝트가 어떤 식으로 조정되는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 이면’의 이야기도 스레드로 정리해 보고 싶다. 규모 검토와 기획 단계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보면 설계와 개발이 단순히 도면과 모델링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시장, 정치, 그리고 기업 간의 역학이 얽힌 다층적 과정임을 실감하는 순간들이 많다.
결국, 내가 얻는 결론은 하나다. 많이 알고 능력을 길러야만 이 복잡한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