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mourning
저는 감히 죽음을 가벼이 여긴 사람입니다. 내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주변이 안 보였다고 말하기보다는, 보기 싫었던 내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환경과 상황의 문제보다는, 내가 쓴 이 빌어먹을 색안경이 문제였습니다. 망가진 것을 알고도 고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았고,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가난했습니다.
나의 감정은 밑 빠진 독에 물도 아닌 공기만을 붓는 작업 같았습니다. 감정의 부자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감정의 흙수저라고 판단했기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맞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저는 계속 흙수저일 것이고, 금수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태어나기를 그랬고, 자라오기를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감히 건들 수 없는 영역의 일들입니다. 저는 그것에 분개했고, 참을 수가 없어 반항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기에
무참히 깨지고, 부서지고, 아파했습니다.
그랬더니 분노 대신 절망이, 감정보다 이성이 들어앉았습니다. 생각해보니 흙으로 된 수저를 연금술사처럼 금수저로 바꿀 수는 없지만, 수저라는 공통점은 있었습니다. 그 공통점으로 할 수 있는 나머지를 해보려고 합니다. 수저로 얻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갈 것입니다. 아마도 삶과 죽음, 어쩌면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은 동등하지만, 삶은 금수저, 죽음은 흙수저와 비슷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것은 흙수저의 몫 같고, 살아가는 것은 금수저의 몫이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있을 겁니다.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전에 가장 좋은 삶을 살다 갈 것입니다.
여전히 죽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언제 다시 죽고 싶다고 시도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저보다 먼저 떠난 친구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살아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글을 쓰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