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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20. 2024

장애의 무서움

renewal.8 장애라는 단어의 감정 



- 감정의 교과서

영화는 내게 값싼 취미였다. 많은 세월이 지나도 5천 원으로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이점이다. 그렇게 영화를 자주 보았다. 교통사고 트라우마로 인하여 "감정"을 지워버린 내게 "감정"을 학습할 만한 좋은 교과서는 영화이기도 했다. 희로애락이 잘 묻어 나왔고,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 내가 공감을 하고, 눈물도 흘리게 된 첫 번째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Me Before You>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Me Before You>이다. 세상과 이별을 준비하는 마지막에 나타난 짜증 나는 여자와 평생 최고의 6개월을 지내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전신마비 환자가 존엄사를 선택하여 지내는 6개월간의 변화는 놀라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는 의지를 얻게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주인공은 안락사를 택했고, 영화는 막을 내렸다.


- 어쩔 수 없는 슬픔

사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주인공의 심경 변화가 일어나, 안락사를 포기하고 죽지 않는 뻔한 미래를 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해피엔딩이 주를 이루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러길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주인공처럼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어도, 누군가로 인하여 내 인생의 행복을 찾게 되면 나도 좀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나도 매일 죽고 싶어서.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른 결말에, 주인공이 결국 죽음을 선택할 때, 나는 울고 말았다. 다양한 의미로 슬펐다. 죽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느껴져서, 그럼에도 나는 안락사를 할 수 없기에, 얼마나 행복해야 죽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어서, 장애는 어떤 행복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 같아서 등등.


- 반대말이 아닌 행복과 불행

행복하지 않다와 불행하다는 다른 말이었다. 주인공은 사랑을 하며 행복했지만, 불행했다. 움직일 수 없기에. 행복할수록 불행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랑할수록 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아졌고, 더한 자유를 꿈꾸게 되었으니까. 타인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것과 나 스스로의 만족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영화를 보며 알아갔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을 영화에서 배웠다. 그래서 영화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누군가의 마음을 나도 이렇게 알아주고 싶었다. 아마 이때부터 나는 조금씩 시나리오에 대한, 영상에 대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또 다른 꿈, 시나리오 작가를 꿈꿀 만큼.


-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

최근 장애를 소재로 삼는 영상매체가 늘어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복잡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들은 장애를 가지지 않았으니, 저들보다 나으니, 행복하죠?’라는 메시지로 느끼지 않을까? 혹은 장애라는 것은 항상 극복해야 한다는 관점을 증폭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영상을 만드는 감독들의 관점이 궁금했다. 어떤 관점으로 저 영화를 만들게 되었을까? 조금은 괴리감이 들고, 왜곡된 관점이 느껴지는 이유가 들 때면 더 고민한다. 그리고 나면 이런 결론이 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영화, 드라마 관계자는 상업적인 영상을 만든다는 것. 장애를 뛰어넘을 만큼의 강점을 가져야 하며, 매력이 충분히 넘쳐야 사람들은 관심을 가진다. 현실의 장애인들이 그렇기 힘들지만, 영상의 장애인들은 그래야만 팔린다. 이런 점들이 쌓여 장애인 당사자와 보호자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너무나도 동화 같은 이야기에.


- 힘들지만 성장의 원동력일 수도

장애가 있고 없고로 행복이 규정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조금 과한 욕심일 것이다. 내가 장애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잊고 살뿐이지, 때로는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누구나 장애를 원하지 않는다. 하물며 나 역시도 그렇다. 없었으면 더 좋은 것. 하지만 그래도 장애가 있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다. 때로는 그 장애로 인하여 힘들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장애로 더한 것을 성취해 낼 수도 있다고 말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결핍이, 부족함이 오히려 내 열정이 되었고, 에너지가 된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나는 이제 장애가 없는 삶이 낯설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들과는 다른 것을 느끼고, 깨닫고, 알아간다. 그런 미래를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우리들을 대변해 이야기해 달라고 전하고 싶다.



- 더 나태했을, 덜 노력하고 살았을, 덜 치열하게 살아 결국 후회가 더 많은 삶을 살아가느니 때로는 부족하더라도 더 애쓰며, 더 노력하며, 더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이 더 반갑다.


- 희생과 노력 그 사이

대부분의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장애를 뛰어넘고 무엇인가를 성취해 낸다. 그렇게 마무리된다. 장애인들은 조금 더 노력하면, 주변 사람들은 아무런 투정 없이 그들을 뒷받침해 주고 도와준다. 자발적인 희생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그것이 옳다는, 맞는다는 인식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장애인이 극복과 성취를 해야만 한다는 관점이 나는 너무나도 싫다. 모두가 그럴 수는 없으니까.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희생이 너무나도 커지니까. 그래서 장애인 당사자에게도 장애는 무섭지만, 주변인에게도 장애는 무섭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배려해 주는 것이, 나에게는 희생으로 다가와서 싫다. 그래서 가능한 한 내가 극복을, 성취를, 일상을 하도록 노력하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 것이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의 생각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 사회의 뒷받침이 있다면, 장애인의 주변 사람들도 조금은 덜 힘들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장애가 더는 무서운 것이 되지 않기를.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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