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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Aug 31. 2024

장애 안내서를 같이 쓰실 분 모집합니다.

장애인으로 살아남기

- 책에 나온 장애인

<오체불만족>의 저자인 오토다케 히로타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의 저자인 닉 부이치치

 

2000년 그 당시 나는 2명의 장애인을 책으로 접했다. 대부분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사람이다.


지금은 연설가로서 더 유명해진 지체장애인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4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사지 절단형 지체장애인이라는 것, 두 번째로는 선천적 장애인이라는 것, 마지막으로는 외국인, 그리고 남성이라는 점이다. 장애를 가지게 되고 장애에 대하여 배울 수 있는 곳은 책 속뿐이었다. 그렇게 유명했던 두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생각들을 했다.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것은 위로보다는 자책했고, 안타까움 대신에 부러웠고, 그리고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팔과 다리가 없는 것,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의 장벽은 정말로 높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일상에서 겪는 불편함이 그들이 꿈꿨던 불편함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위로받기보다는 꾸짖음을 들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나는 분노했다. 그 이유는 나와 그들의 장애를, 불행을 비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어린 나조차도 나와 타인을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다. 자기 손에 박힌 가시가 남의 크나큰 고통보다 더 큰 것처럼. 그래서 못 쓰는 팔이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타인은 다른 것이 가장 큰 고통인 것처럼.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고통의 정도를 비교하며 살지 않았다. 그저 고통의 농도 차이라고 생각이 드니까 나보다 절대적으로 덜 힘들어 보이는 사람도, 더 힘들어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보다 잘하고, 못하고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농도의 고통과 힘듦에 공감하려고 애를 쓰며 살았다.


- 부러움, 질투 그 사이 어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저들은 나보다 상실이 적을 거라고 여겨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비장애인의 삶을 몰랐더라면, 그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 크나큰 통증과 상실감은 없었을 테니까. 물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장 두 분은 달려와 나에게 화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장애인으로 살았던 삶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괴로운 일이다. 그때의 자유를 모르는 것이 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게다가 내 뇌는 다치고 나서의 실제 팔과 내 머릿속의 팔을 다르게 인식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무리 머릿속에서 팔을 움직여도 현실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인지 오류가 생기는 것조차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외면했고, 회피했다. 게다가 절단 부위에서 오는 통증도 심했다. 시도 때도 없이 모습을 바꾸며 나를 괴롭혔고, 나는 그에 맞는 해결책을 매번 찾아야 했다. 사고로 다쳤기에 감수해야 하는 것들은 참으로 많았다. 신체적 외상 후에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많은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지금도 여전히 겪고 있다. 답이 없는 문제들에 나는 결국 무릎을 꿇고 무너져 내렸다.


두 번째로는 나와 다르게 그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조력자가 있다는 점도 부러웠다. 장애를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할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부러웠다. 장애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인정한다는 것은 당사자도, 보호자도, 그 누구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냉정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장애를 없앨 수 있다는 희망고문이 아니라 그 냉정함이라고 생각한다. 쓰러져도 일어날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따뜻한 냉정함. 그 냉정함을 가진 가족이 나에게는 없었다. 우리 가족은 너무 평범했기에. 특이해 본 적 없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특별함을 바란다는 것은 현실에 나타나지 않는 동화 속 이야기였다. 가족에게서 지지받지 못하고, 가족들과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외로운 싸움이었다. 나 스스로 내 선택이 옳았다고,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나는 괜찮지 못한 상황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그들보다 먼저 좌절했다. 장애를 치료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도 좌절했고, 그들보다도 더 좌절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도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런 부분에서 나는 오히려 내 장애가 오토다케 히로타다와 닉 부이치치보다 신체적으로 더 가벼운 장애라 해도 더 무거운 하루하루를 버티며 지냈다. 빠른 시일에 지칠 만큼.


- 나라도, 나부터

우리나라와는 문화가 다르다 보니 당연히 100%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른 가족문화에서 살고, 다른 사회적 시선을 받다 보니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장애인을 찾기 시작했다. 나보다 먼저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나도 나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없었다. 무엇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고, 어려웠다. 한국 문화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숨고, 숨기는 문화에서는 내가 찾지 못할 정도로 숨어버린 것일까?


- 그래서 나는 숨지 않기로 했다.


내가 숨지 않고 나선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사회가 변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 사람 한 명, 두 명 정도만 생각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나부터 시작하여 달라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들처럼 나서고 싶어졌다. 쓰고 싶어졌다. 사실 별거 아닌 장애일 수는 있지만, 그래서 더 공감할 수 있는 장애이지 않을까?


그래도 최근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불편함과 고민들. 그런 것들을 다룬 안내서가 없다. 나도, 이 글도 그런 목소리이기를 바란다. 이 책에는 그것들을 모두 담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주제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그 시작이 이 글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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