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울증이라는 걸 처음 깨달은 게 3년쯤 된 것 같다. 여러번의 신호가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살아왔었다. 누구나 이 정도는 힘들고,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있고, 누구나 이 정도는 버티며 살고 있다고 날 다잡았다. 이 정도로 유난 떨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버티던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죽으면 모든 게 편해지겠지.'
'이대로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내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리고 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열심히 찾았다. 엄마, 남편, 어린 딸아이를 생각하며 처음으로 정신의학과에 진료를 예약했다. 우울과 불안, 스트레스 모두 높은 점수로 용량이 높은 약을 먹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게 그 즈음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해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렇게 1년 후, 약을 끊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아니, 좋아진 줄 알았다.
하지만 우울증은 다시 찾아왔고 난 깨달았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1년 동안 그저 약으로 덮어놓았을 뿐, 내 마음의 병은 그대로였다. 다시 무기력해졌다. 회사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며 다시 상담을 예약했다. 약을 먹으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회사 근처의 정신의학과에 갔다. 새로 마주한 의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울 점수, 불안 점수, 스트레스 점수가 다 높습니다. 약을 다시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의 병도 병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난 아팠고, 다시 치료를 시작했다. 의사는 내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듯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어디서부터 이 아픔의 원인을 찾아봐야 할까. 난 의사에게 28년 전 이야기부터 꺼냈다.
1996년. IMF가 코앞에 닥쳤던 그 시절. 아빠의 사업이 보란듯이 망했다.
잊을 수 없던 그 날, 우리 집의 모든 물건에 빨간색 스티커가 붙었다. 스티커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교 앞에는 나를 기다리는 아저씨들이 생겼다. 엄마와 나는 빨간 딱지가 가득한 집에서 연락도 안되고 집에 들어오지 않던 아빠를 기다렸다.
어느 날 새벽, 아빠가 집 앞에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층이었던 우리집은 밖의 소리가 잘 들렸고, 아빠를 기다리던 빚쟁이들과 아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놀란 나를 꼭 끌어안고 우셨다. 결국 아빠는 그 날 집으로 들어오시지 못했다.
내 인생은 한 순간에 달라졌다. 1년에 서너번씩 해외여행을 다니고, 단 한번도 무언가를 사달라고 부모님을 졸라본 적도 없었다. 집안일은 이모님이 오셔서 해주셨고, 난 공부 대신 발레, 스케이트, 미술, 첼로, 플룻, 수영을 배웠었다. 1년 등록금이 몇 백만원은 훌쩍 넘는 사립 초등학교에, 반 친구들을 모두 불러 호텔에서 생일파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부족함 없이 컸던 12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풍족했던 날들이 아니었을까.
아빠가 들어오지 못한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이상한 낌새를 챈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다니던 모든 학원을 그만뒀고, 갑자기 엄마는 네가 살 길은 공부 뿐이라고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엄마의 그 말들을 100%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누리던 모든 게 달라졌으니.
얼마 후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다. 아빠가 짐을 챙기러 온 날 밤, 엄마와 아빠는 소리지르며 다투셨고 아빠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난 아빠가 남긴 얼마의 빚과 함께 엄마와 둘이 남았다. 엄마는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을 보며 얼마나 막막했을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일생에 처음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외로웠다. 하지만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숨죽여 우는 엄마를 보며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12살의 난 불안했다. 엄마마저 날 버리고 가버릴까 봐.
내가 중학교 때 도망쳤던 아빠의 재혼 사실을 알았다. 아빠는 나를 두 번 버렸다. 혼자 나를 키워야했던 엄마는 이리저리 돈을 빌리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했고, 짜장면이 먹고 싶다는 딸에게 소리를 질렀다. 난 고작 15살이었다. 엄마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기엔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다. 그래도 엄마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다. 의사는 나의 과거 이야기를 듣다가 말했다.
"죄책감이 심하시네요. 자책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처럼 난 엄마가 힘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았다. 12살부터 39살인 지금까지. 내가 없었다면 엄마는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아빠가 날 버렸을 때 엄마도 날 버렸다면 차라리 엄마의 삶은 편했을까. 힘들어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내 탓인 것만 같아 슬펐다.
결과적으로 내 우울증과 불안증의 시작은 1996년이었다. 버림받기 싫은 마음에 엄마의 눈치를 보고, 엄마가 기분 좋아할만한 말만 했던 것 같다. 12살의 나를 돌아보면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떠오른다. 예민하고 화나있고 신경질적인 엄마, 그리고 엄마의 눈치를 보는 나.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엄마는 지금도 나에게 사춘기가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사춘기의 나는 내 감정보다 엄마의 감정을 먼저 살피는 아이였고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꾹꾹 감정들을 눌러놓았던 것 같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서 난 이미 말을 잇지 못할만큼 울고 있었다. 앞에 놓은 휴지곽을 조용히 밀어주는 의사에게 민망할 정도로 오열하며 울었다.
"약을 드릴 테니 다음주에 뵙죠."
약을 받아서 다시 회사로 가는 동안 운 흔적을 지워보려 하늘을 보았다. 유난히 파란 초겨울 하늘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약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든든하게 느껴졌다. 약만 먹으면 다 해결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