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향하여, 일곱

chapter. 열왕기상

by 깊은 연못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4:29)


지혜와 총명이 아무리 쏟아부어져도 그것을 잘 쓰려면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후히 주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을 넓은 마음도 함께 주신다. 마음의 크기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담는 그릇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시며 우리를 받을 만한 그릇으로 또한 빚어주신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성전 건축은 이 구절부터 시작인 듯싶다.

'현지: 어질고 지혜롭다'는 이름으로 살며 적어도 이름값은 해야지 다짐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차원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 내내 가장 좋은 것을 후히 주셨고, 무언가 풍성하게 누렸다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넉넉한 크기의 그릇으로 나를 빚으셨다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 같아 감동이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후히 주시고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니다.
주시는 것은 물론 받는 것조차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8:11)


영광의 시대를 경험하고 눈으로 본 그들이 부럽다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8:48-50)


솔로몬의 기도문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몰랐겠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솔로몬에게 미리 기도하게 하셨다. 이 기도를 근거로 포로로 끌려가 훼파된 성전을 향해 기도하던 에스겔, 다니엘 등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신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긍휼도 얻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시간을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모든 순간마다 오차 없이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 이어지고 있다.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11:13-14)


눈에 보이는 세속사가 하나님의 구속사 아래 움직이고 있다. 어떤 왕조가 일어나고 망하는 흥망성쇠가 흡사 사람의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 그 사실이 지금 나에게 펼쳐지는 일 또한 하나님의 손 밖에 있는 것은 없다고 신뢰할 근거가 되며 안정감이 된다. "우리는 오직 당신이 하시는 일에 반응할 뿐입니다”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15:14)


굉장한 모순이다. 제일 중요한 것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다?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스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나 마음이나 장면이 나오면 이분은 구원을 받았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나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알려주신다. 모순덩어리면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 어떤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 마음, 나 또한 그런 모순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아신다. 그 마음을 아시는 것만으로도 꽤 충분해서 성경에 기록된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 이것저것 묻는 대신, 저 한 구절을 근거 삼아 하나님께 고백한다. “주님만 내 마음 아십니다”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9)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경험상) 도망자에게 이 질문은 무서웠다. '해야 할 일을 다하지 않고 넌 왜 여기 있니?'하고 찾아내서 다그치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하나님의 안타까움이었다. '내가 널 얼마나 귀하게 지었는데, 왜 이곳에 있니. 너는 여기 이렇게 있을 존재가 아니란다'라고 존재를 각성하게 하는 말씀이었다. 회복으로의 부르심이었다. 어떤 일도 하나님이 지으신 내 존재를 흔들 수 없는데 엘리야처럼 잊는다. 이 질문의 목적인 '그곳 말고, 내게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초대가 내 정체성을 기억하게 한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2)

"세미한 소리"


하나님일 것 같은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에도 계시지 않았고 세미한 소리에 계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실 것이다’라는 우리의 제한과 생각을 깨부수고 찾아오신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가장 알맞고 가장 선한 당신의 방법으로 찾아오신다. “요란한 현상이 아닌 조용한 관계에 계신 하나님, 그 관계의 세미한 속삭임에 언제든 내가 반응하기 원합니다”


19장 전체


손에 꼽아 사랑하는 말씀, 무엇보다 회복의 말씀. 직전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큰 승리를 거둔 엘리야가 패닉에 빠졌다. 두려움에 압도당해 사명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있다. 그 도망자를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19장이다.

하나님은 도망친 아담을, 야곱을, 모세를, 엘리야를, 요나를, 그리고 나를, 수많은 도망자들을 뒤쫓아 오신다. 아니, 사실 오늘 말씀의 엘리야처럼 그 도망이 끝나는 곳에서 이미 날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는데 그 끝자락에 미리 가서 기다리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실까.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깊고 넓고 크다.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21:3)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로 억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가 최악으로 보일 때, 억울했었다. 그러나 억울함에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내 소유의 포도원보다 (아직 목숨은 못 걸고) 더 큰 자산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까지가 나의 할 일이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일이다. “월권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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