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향하여, 열

chapter. 역대하

by 깊은 연못


이 두 그룹이 편 날개가 모두 이십 규빗이라 그 얼굴을 내전으로 향하여 서 있으며 (3:13)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5:7)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바로 이 지성소 그룹의 날개를 지칭한다는 말씀이란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는 하나님의 안약궤가 있고, 곧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곳이다.


그래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쉬기 원합니다'라는 고백은 그의 임재 아래 있기를 원한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나의 유일한 샬롬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임재만이 내가 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펴신 날개로, 날개 그늘 아래 임재로 나를 감싸 안아주세요.”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5:14)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극치


일곱째 달 제 이십삼 일에 왕이 백성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내매 백성이 여호와께서 다윗과 솔로몬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7:10)


하나님은 내 마음의 주관자이시다. 출애굽기에서 아론이 모세를 보고 마음에 기뻐함을 두셨다는 말씀을 보고 흥미로웠던 것이 기억난다.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즐거워할 수 있다.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마음에 반응하는 태도가 아닐까.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7:14-16)


참 유명한 말씀이다. 다만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장인 줄은 오늘 읽으며 알았다. 왕으로서 모든 경우의 수를 대며 기도하는 백성들 모두에게 응답하여 달라는 요청에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듯, 그리고 엄마가 자신의 이름보다 아이의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듯, 그 눈과 마음이 영원히 성전 위에 있겠다고 약속하신다. 그의 사랑하심이 그 아이를, 그 백성을 특별하게 한다. 날 사랑하심이 오늘도 성경에 써있네.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12:1-2)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12:14)


나라가 강해지니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다. 물론 르호보암의 잘못도 있겠지만,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은 쉽게 흩어져버린다. 근본적으로 약한 존재다. 나도 아는 인간의 나약함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이상하게 오늘은 "여호와께 범죄하여 애굽 왕이 유다를 치러 왔다"는 말씀이 하나님의 질책이 아닌 권면으로 들린다. 어떻게든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장치였을 것만 같다.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나는 어떤 장치로 어떤 권면을 받고 있을까? 기도로 물으러 나아간다.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도 없애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고(15:8)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15:17)


열왕기하를 읽으며 제일 의아했던 부분이었다. 왜 그 산당 하나 제거하지 못해서 쩔쩔맬까 하고. 그런데 그것이 오늘 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영원히 나를 사랑하신다, 그는 내 삶의 주인이시다, 이런 중요한 명제는 정작 믿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 모습이 아사 왕과 같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것이 내 믿음의 한계와 싸워 만드는 정말 최선이다.
이것이 최선이라는 죄송한 고백에 하나님은 “산당은 제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했다”라고 말해주신다. 부족한 최선의 마음도, 애쓰는 내 마음도 받아주셔서 그의 인자하심이 크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20: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20:17)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는 근거는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하나다. “주께서 사랑하시는”이라는 수식어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근거와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그때에서야 가장 멋진 장면, 나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승리를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장면 앞에 서게 되지 않을까.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적군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하니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까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하니라(25:8-9)


내가 계획하고 지불한 것, 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선택해야 할 것은 전능의 하나님




번제와 화목제의 기름과 각 번제에 속한 전제들이 많더라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일이 순서대로 갖추어지니라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29:35-36)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이르렀더라 (30:26-27)


예상과 계획에 없이 일이 갑자기 되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기쁨까지 예비하신다. 그 기쁨의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에 닿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기쁨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내 행복과 기쁨에 가장 관심이 많으시다. 나의 기쁨을 듣기 원하셔서 땅에서 하늘로 기도를 길어 올리시는 그 열심이 왠지 귀엽고 따뜻하다.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34:27)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겸비하여 낮아짐으로 인해 하나님이 들으신다.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백성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겸비함과 애통함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 어떤 마음으로 구하는지가 나의 수많은 종교개혁보다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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