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욥기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3:20)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3:26)
왜 이 세상에 나와서 나에게 평온도, 휴식도 없이 불안만 있는 것일까, 라는 고백은 한동안 나의 고백이기도 했다. 욥기가 전개되는 내내 마음이 아린 그의 고백이 어떻게 변하는지, 하나님이 그를 기다리시는 시간이 궁금해진다. 이 불안의 시작점을 고백하는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없으면 그저 모든 것이 화려한 지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골짜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가 없어서였다. 오늘 그 골짜기를 걷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지.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9:16-20)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16:4-5)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16:20)
친구들은 욥에게 원론적인 이야기, 그러니까 교회에서 우리가 듣던 '정답'을 늘어놓고 있다. 그 말은 정답일 수 있지만, 파편적이고 이론적이며, 바리새인적이었다. 이미 그 말 자체로 욥에게 폭력이었을 것이다. 서로를 정죄하는 과정이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나님께 매달린다. 그 눈물을 친구들이 아닌 하나님께 향하여 흘리는 것이다. 나는 그 매달림에서 포기하지 않았나. 놓아버리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23:4-6)
욥은 하나님이 힘으로 자신을 압제하실 분이 아니라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나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성경에는 자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상황이 등장한다.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믿을 수 있는가.
동일한 상황에서 나도 '당신의 힘으로 나를 누르시니 나는 무기력하며, 바랄 것이 없다'라고 했다. 동일한 말이지만, 그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에 실패했다. 내가 포기해놓고 하나님이 날 버리셨다고 원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악력으로 붙들려 이 자리에 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40:2)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4-5)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42:10)
트집 잡는 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그에게 고난의 40장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에 대해 들어 아는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통해 나는 주님을 더욱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는 근거는 욥이 자신의 의로움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기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는 것도 “구원은 오직 은혜”라는 전제가 세워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