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트레킹_다섯째날 1편

스위스 국도를 걸었다

by 불나무

부흑쌩삐에흐~오흑씨에흐(트레킹 4시간, 37,000걸음)~마흐띠니(기차)

다섯시경 눈을 떠 슬슬 떠날 채비를 하고 커피를 내렸다.

오늘은 스위스의 소도시인 마흐띠니까지 걸어가는 날이다. 이 구간은 버스냐, 트레킹이냐를 많이 고민했던 구간이다. 이틀 연속 쉬고 싶지 않아 걷기로 했다. 마흐띠니까지는 걸어서 약 8시간, 30km 거리인데 대체로 내리막이다. 결국 내리막이라서 포기하게 된다.

시야가 밝아지고 나서야 깨달은 나의 길

아침 7시의 부흑쌩삐에흐는 적막했다. 어둡고 으슥한 스위스의 시골길을 혼자 걷기 시작했다. 30분쯤 지나 날이 밝고, 시야를 확보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오늘 루트는 전 구간이 국도라는 걸. 대체 언제쯤 구글맵이 똑똑해질까 생각하면서 꿋꿋이 걸었다.

어떤 구간은 갓길조차 없어, 차가 안 다니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달려가야 했다. 다른 길을 찾아볼까 싶어 산속으로 발을 들였다가, 대자연의 공포에 질려 뛰쳐나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음침하고 적막한 자연이 몸과 마음을 압도하는 기분이다.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말도 안되는 공포감.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다시 국도로 나와 걸으면서 생각했다. 자연은 내 안위 따위 고려하지 않지만, 적어도 도로의 운전자들은 나를 고려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옆에서 차가 쌩쌩 달려도 오히려 덜 무서웠다.

국도에는 공사 중인 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자전거전용 도로를 확장하는 듯했다. 다행히 공사장의 인부들은 나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게 인사를 해주기도 했다.

한 가지 좋았던 점은, 빨간머리앤의 배경 속에 들어온 듯한, 소떼와 양떼가 가득한 몽블랑 산군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누리는 듯한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차도에 너무 가까이 소떼를 풀어 놓아서 깜짝 놀랐다.

이따금 들어선 작은 산악 마을들은 평화롭고 목가적이고 운치 있었다. 광활한 자연과 낯선 마을의 이국적인 조화는 예전에 걸었던 산티아고를 떠오르게 했다. 상쾌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까지, 어딘가 새롭고도 익숙해 문득 울컥했다.

우연히 들어간 평화로운 작은 마을(Liddes)

3시간 가까이 내리막을 걷다 보니 발목과 무릎에 피로가 왔다. 차라리 업힐이 나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육의 피로는 참을 수 있지만, 뼈 마디의 통증은 참아선 안된다.

찾아보니 오흑씨에흐라는 마을부터 기차가 다닌다. 언제 또 이 낯선 마을에서 기차를 타보겠는가. 그렇다고 곧장 마흐띠니까지 가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그 중간 지점인 성바셰까지만 기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거기서부터 다시 걸어갈 생각이었다.

마흐띠니까지 어떤 루트로 걸어야 할지 검색하는 사이, 성바셰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니 맞은편에는 마흐띠니행 기차가 출발 대기 중이었고, 나는 어디가 출구인지 찾기 위해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때 현지인 아저씨가 다가와 마흐띠니에 가려면 이 기차를 타야 한다고 알려줬다. 내 상황을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빨리 타라고 재촉한다. 마침 루트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던 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엉겁결에 기차에 올라탔고, 아저씨는 다시 와서 전광판의 "Martigny"를 가리키며 읽어줬다. 낯선 여행객을 도와준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듯했다.

마흐띠니에 도착하니 11시 30분. 예상보다 너무 이르다. J형 인간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역을 나와 갈피를 잃은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낯설고 냉랭하다. 제네바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비슷한 종류의 이질감. 다시 생각해보니 스위스에 대한 내 선입견이 다분히 반영된 듯도 싶다.

찬찬히 도시를 걸어보기로 했다. 도시는 잘 구획되어 있었고, 현대적 건축물들이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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