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꾸르마요르~QC스파~아오스타~부흑쌩삐에흐(노트레킹, 16,239걸음)
오늘은 정규 TMB루트에서 벗어나는 첫번째 날이자, 트레킹이 없는 치팅데이다.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쉬려고 작정한 날이다. 오전에 QC SPA에서 온천을 하고, 아오스타로 넘어가서 점심식사 및 간단한 여행 후에 부흑쌩삐에흐로 넘어갈 계획이다.
일어나자마자 영 호스트가 자랑하던 호텔 조식이 떠올랐다. 어젯밤 식사를 했던 자리에 오밀조밀 조식 부페가 준비되어 있었다.
햄, 치즈, 요거트, 착즙쥬스, 바게트, 파이류, 샐러드, 잼, 버터 등 구성이 풍성하다. 취향에 따라 아주 건강하게, 혹은 아주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오믈렛, 스크램블에그 같은 핫디쉬는 주문 즉시 만들어준다. 흔한 조식 같지만, 하나하나 정성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체크아웃하는데 어제 저녁 와인값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분명 마르코가 글라스와인 8유로, 바틀이 48유로라고 했는데, 리셉션 직원은 글라스 10유로, 바틀 52유로라며 오늘 처음 보는 요금표를 내밀었다. 전날 내가 메모해 둔 가격을 보여주며 설명하자, 다행히 가격을 정정해줬다. 부르는 게 값인가 보다.
QC스파(프레생디디에)는 꾸르마요르 다운타운에서 버스로 30분 거리다. 구글맵 기준 도보 1시간 10분이라, 트레커답게 걸어가기로 했다. 걷다 보니 어느새 국도에 들어섰고, 되돌아가기 애매해 그대로 걸었다. 망할 구글맵은 인도와 차도를 제대로 구분해주지 않는다.
산티아고 순례길 때도 그러다가 지나가던 드라이버한테 욕을 먹었던 기억이 스치며 불안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아 최대한 가장자리로 붙어 조심조심 걸었고, 무사히 도착했다.
9시 반경 스파에 도착했다. 사람이 꽤 많았는데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그림 같은 몽블랑뷰를 보며 노천 온천을 즐겼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물은 그리 뜨겁지 않았지만, 제트스파가 잘 되어 있어 몸은 충분히 풀렸다.
12시 반, 아오스타행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거리의 아오스타로 이동했다. 아오스타는 로마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고풍스러운 소도시였다. 번화가는 약간 바르셀로나 느낌도 났다. (내 경험치가 한정적이라 비교할 만한 곳도 제한적이다)
오후 2시. 시간은 애매했지만, 다시 올지 모르는 이곳에서 반드시 미식 경험을 해야 한다고 세포들이 속삭였다. 지나가면서 눈여겨본 노천카페의 테라스 자리에 앉아 프로세코와 지중해식 샐러드를 주문했다. 앤쵸비와 부라타치즈의 고소한 짭짤함이 입안에 착 감긴 뒤, 프로세코의 미세한 탄산과 청명한 산도가 혀를 산뜻하게 정리해준다. 특별할 건 없는 메뉴지만,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있다.
프로세코 한 병을 비우니 기분 좋은 취기가 올랐다. 부흑쌩삐에흐행 버스를 타기까지 한 시간이 남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활기차고 매력적인 도시다.
부흑쌩삐에흐에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하니, 투숙객은 나뿐인 듯했다. 짐을 풀고 나서 잠깐 낮잠을 잤더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다.
오늘은 활동량도 적고 아침, 점심을 든든히 먹어 최대한 가볍게 먹고 싶었다. 주방장 추천 메뉴는 안심스테이크였지만, 욕심을 억누르고 비프타르타르를 주문했다. 매운 걸 먹을 수 있냐고 묻길래 환장한다고 대답했다.
비프타르타르는 아주 쨍한 타바스코 맛이었다. 시큼새큼 짜고 강렬한 매운맛에 고기 본연의 향도, 함께 시킨 레드 와인의 향도 완전히 묻혔다. 오늘 저녁은 실패다.
옆테이블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앉아 있었고, 식사 내내 테이블 위로 손을 포개 잡고 있었다. 다정한 눈빛과 조근조근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타바스코의 매운맛 때문인지, 노부부의 모습 때문인지 부드럽고 순한 맛이 당겼다. 주방장의 추천을 받아 부용(부용이라고 했지만, 찾아보니 블루테나 포타주에 가깝다. 고기육수 베이스의 뭉근한 수프)을 주문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맛. 알고 보니 노부부 중 여성분이 먹고 있던 것과 같았다. 그 분과 참 잘 어울리는 맛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