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어디갔어
호텔 스텔라델노르드는 다운타운 중심에서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비수기라서 외국인 투숙객은 나 뿐이었고, 대다수가 현지인이다.
이 호텔은 재방문 의사 200%다. 몽블랑이 한눈에 보이는 뷰에, 객실은 따뜻한 가정집 같은 느낌이다. 가족 운영이라는 리뷰를 본 기억이 있는데, 주인장의 딸로 추정되는 영 호스트는 친절함의 끝판왕이었다.
식당, 객실, 테라스 등을 꼼꼼하게 안내해 주었고, 5시에 티타임이 있으니 꼭 와서 즐겨달라(인조이 플리즈~)고 했다. 나는 또 강한 책임감이 생겼다.
저녁 먹으러 다운타운까지 다시 걸어갈 생각으로 귀찮았는데, 호텔에서 식사가 가능하다고 해서 7시 30분으로 예약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운타운을 즐기지 못한 건 좀 아쉽다)
오랜만에 욕조가 있는 샤워실이라 뜨신물에 다리도 풀고, 빨래도 해서 테라스에 널었다. 그리고 5시 땡-하자 티타임을 하러 갔다. 나를 위한 티파티가 펼쳐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
라운지 소파에 인기척을 내며 앉았다. 5분쯤 지나 영 호스트가 느릿느릿 난로에 장작을 넣어 불을 지피더니 말을 걸었다. "유 원 섬 티?" "예스, 플리즈."
영 호스트는 뜨거운 물과 여러 종류의 티백을 내 앞에 가져다줬다. 이건 내가 객실에서 직접 해도 되는건데.
그제야 아까의 "인조이 플리즈~"는 의례적 멘트였다는 걸 알았다.
난로 옆에서 차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6시다.
6시부터 주류 주문이 가능하다. 바에 가서 와인리스트를 물었다. 바텐더가 글라스로 판매하는 와인을 테이스팅 해줬는데, 영 아니다. 라이트바디에 저렴한 단맛. 그거밖에 없다길래 그냥 한잔 시켜서 자리에 왔다.
바텐더가 따라와서 바틀로는 좋은 게 많다며 주절거렸다. 어차피 저녁식사와 함께 한병 마실 생각이니 지금 오픈해도 좋다고 했다. 지금은 풀바디의 레드와인이 마시고 싶고, 저녁 메인으로 씨바스를 먹을 거라서 화이트도 마실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와인 수다가 시작됐다. 나는 이탈리아와인은 끼안티클라시코 정도만 알고 있고,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로컬 와인을 맛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몬테풀치아노가 좋다며 한 병을 가져와서 다짜고짜 오픈해 버렸다.
"왓이프 아돈라잌잇?" 따지듯 물으니, 그러면 그냥 글라스로 팔면 된단다. 가격을 물으니 48유로라고 했다.
지난 이틀간 마신 와인들은 병당 30유로 초중반이었다. 바가지인가 싶어 순간 톤이 높아졌고, 바텐더는 와인에 대해 구구절절이 설명했다. 한 모금 맛을 보니, 가격을 납득할만해서 그냥 마시기로 했다. 풀바디에 짙은 루비색, 검붉은 과일, 감초, 초콜릿 등의 향이 났다.
이때부터 바텐더는 본업을 잊고 내 옆에서 조잘대기 시작했다.
이름은 마르코. 바이크를 좋아하고 틈나면 등산을 즐긴다. 본인은 10시에 일이 끝나니 그때부터 같이 와인을 더 마시자고 했다. 밤새 좋은 시간을 보내자는 등 이탈리아 특유의 오일리한 플러팅이 계속됐다.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하며 나는 네고에 들어갔다. 니가 권한 바틀을 내가 사줬으니 그 전의 글라스와인은 공짜로 해달라. 그럤더니 그건 돈을 받아야 하고, 대신 저녁식사 때 화이트 와인 한잔을 공짜로 주겠단다. 한잔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더니, 두 잔을 주겠다고 했다. 잠시 짱구를 굴리고는 오케이 했다.
내일 일정을 묻길래 오전에 스파를 하고 오후에 아오스타로 넘어갈 거라고 했다. 본인이 스파 끝나는 시간에 맞춰 와서 바이크로 날 아오스타에 데려다주겠단다.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고마웠고 오랜만의 시덥잖은 대화가 재미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의 메뉴는 주방특선 샐러드와 Sea Bass! 농어다. 특선샐러드에는 구운 사과와 크림소스를 토핑했다. 구운 사과의 녹진한 단맛과 소스의 크리미함이 묵직한 몬테풀치아노와 아주 잘 어울렸다.
곧이어 농어스테이크가 나왔고, 어제와 달리 선도가 좋아 기분이 좋았다. 살짝 오버쿡 느낌은 있었지만 담백했고, 토핑된 올리브와 토마토의 산뜻, 짭짤함이 맛을 잘 끌어올렸다.
마르코는 화이트와인 두 잔이 아니라 스몰 보틀 한병(아마도 35cl)을 통 크게 내어줬다.
그는 일하는 중간중간 내 상태를 체크하며 나에게 와서 말을 걸어줬다.
9시가 좀 넘어, 배부르고 취기가 오르니 졸음이 밀려왔다. 마르코에게 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좀 자야겠다고 얘기했다. 남은 와인은 이따가 나와서 마저 마실 거니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술이 깨고 생각하니, 이건 좀 창피하더라)
자고 일어나니 10시 20분, 눈 뜨자마자 남긴 와인부터 생각 났다. 허둥지둥 나가보니 모든 테이블은 정리되어 있었고, 영 호스트만이 날 맞아줬다. 10시 이후로 함께 한 잔 하자던 마르코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레드와인은 따로 킵해 두었다. 나는 약간의 허무와 함께, 남은 와인을 천천히 비웠다. 내일 아오스타 데려다준다며.. 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