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은 따뜻하다
레우슈에서 11시경 트레킹을 시작하여 레콩타민 다운타운에 도착하니 3시반. 트레킹 시간은 채 5시간이 안되어 무리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거센 비가 복병이었다.
다운타운에서 내가 예약한 숙소까지 30분가량을 더 가야 했는데, 장대같은 빗속에서 핸드폰 지도로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나를 도와주려나보다. 나는 영어로, 할아버지는 프랑스어로 말을 했지만 손짓발짓을 섞어 대충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차 안이 담배 냄새로 가득해 잠시 긴장했지만, 뒷좌석에 앉은 잘생긴 검정개의 애교가 나를 안심시켰다. 할아버지는 지인과 통화까지 해가며 숙소를 수소문해 주셨고, 나를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체크인하자마자 나는 짜증이 났다. 숙소 안내 메일에 "근처 5분 거리에 레스토랑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외진 곳인걸 알고도 잡은 숙소였다. 그러나 그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고, 비는 여전히 퍼부었고, 우산도 빌릴 수 없었고, 택시도 부를 수 없었다.
다행히 숙소 주인할머니께서 인근 20분 거리의 영업 중인 식당을 예약해 주셨는데, 나는 이 빗속에 또 20분을 어떻게 걸어가냐며 투덜거렸다. 할머니는 고작 10분을 못 걷냐며 타박하셨고, 아니 20분이라구요! 티격태격 끝에 상황을 받아들였다.
핫샤워를 마치고 나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지만, 새벽 5시에 먹은 기내식 이후 먹은 게 없었던 터라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식당은 7시 오픈이라는데, 못 참겠다.
6시에 숙소를 나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20분을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손님은 나뿐이었다. 비시즌이라 손님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숙소 주인할머니의 예약 전화를 받고 오직 나를 위해 식당을 열어준 것 같았다. 감사한 마음에 맥주를 홀짝이며 와인을 한병 주문했고, 오픈 전이지만 어차피 손님은 나뿐이라 식사도 바로 준비해줬다.
첫날의 저녁메뉴는 스테이크다! 파스타와 샐러드, 고트치즈소스를 곁들인 스테이크에 현지산으로 보이는 쉬라품종 와인을 페어링했다.
너무 지치고 배고픈 상태라 신발도 맛있을 타이밍이었지만, 아쉽게도 맛은 그냥 그랬다. 레어로 주문한 스테이크는 오버쿡이었다.
마침 주인으로 보이는 언니가 다가와 음식이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얘기했고, 주인언니는 잠시 후 새로 요리한 스테이크 한덩이를 추가로 가져다주었다.
정말 고마웠지만, 두번째 요리 또한 기대하던 맛은 아니었다. (고기 자체의 문제인 듯하다)
이쯤 되니 스테이크는 그냥 포기했다.
대신 몽환적 일렉 느낌의 음악과 창밖의 빗소리, 그곳만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와인과 함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디저트로 상큼한 리몬첼로를 한잔 마셨고, 분위기에 취해 주인언니 커플이 마시던 제네피 한잔을 따라 마셨다. 달콤쌉쌀하고 향긋한 맛의 제네피 샷이 더해지니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제네피: 알프스 허브로 만든 리큐르로, 송진같은 허브향에 꿀의 단맛과 박하같은 청량감이 조화롭다)
숙소로 돌아오니 나와 같은 도미토리룸을 쓰는 한국인 청년이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트레킹이 처음이었는지 오늘 하루를 걷고는 기대했던 바와 다르다며, 이후의 일정을 포기하고 니스로 갈거라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거니까. 그 친구와 한참동안 수다를 떨다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