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과 조난의 경계에서
레콩타민~라발므~본옴므~르사피유(트레킹 6시간, 34,000걸음)~부흑쌩모히쓰(택시)
5시 30분경 잠에서 깼다. 아래층 주방에서 달그락 소리가 나길래 가보니 중국인 커플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자분(대니)이 같이 식사를 하겠냐고 물어보길래 냉큼 그러겠다고 했다. 뜨겁게 삶은 면에 매운 소스를 곁들여줬다.
맛있었다. 오전 내내 걸으면서 이 식사에 감사했다. 심지어 두개뿐인 푸딩 중 하나를 나한테 줬다. 착한 사람들이다.
그들도 몽블랑 트레킹 중이었고, 오늘 나와 목적지가 같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캠핑을 준비해 온 이들은 오늘 르사피유에서 캠핑할 계획이란다.
캠핑 장비따윈 없는 나는 당연히 시내에 있는 호텔행이다. 르사피유에서 남쪽으로 16km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부흑쌩모히쓰에 도미토리룸을 예약해뒀다. 그리고 내일 다시 르사피유로 와서 트레킹을 시작할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지만 르사피유~부흑쌩모히쓰 구간 택시요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우리는 그 다음날의 일정도 같았다. 사실 같을 수밖에 없다. 르사피유에서 다음 거점인 꾸르마요르까지 28km나 되지만 중간에 묶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은 코스의 끝자락에 있는 캠핑장에서 캠핑을 하거나, 버스를 이용해 꾸르마요르 시내까지 간다. 지금은 비시즌이라 캠핑장도 닫았고 버스도 운행 종료다.
난 택시를 알아봐 놨지만 요금이 너무 비싸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택시를 공유하는 옵션을 열어두고 걸으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예쁜 노트르담성당을 지나며 본격 트레킹이 시작됐다. 고도가 오를수록 그들의 걸음이 뒤처지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_아침도 얻어먹은 터라 미안했음에도_장시간 보조를 맞추는 일이 서로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속도를 높였다.
오전에 비예보가 있었지만 날씨는 아주 쾌청했고, 1일차를 마친 다음 날치고 몸도 가벼웠다. 길가의 귀여운 소떼를 찍어가며 여유롭게 걸었다.
그러던 중 한 커플이 엄청난 속도로 나를 추월했다. 현지인으로 보였고, 그 뒤로 다신 볼수 없었지만 난 곧 그들에게 깊이 감사하게 된다.
라발므를 지나 본옴므를 향해 고도를 높이다 보니 어느덧 발밑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늘의 최고점은 약 2500m. 정상에 접근할수록 춥고 적막했으며, 그곳엔 오직 나뿐이었다.
길의 방향마저 흐려져, 앞서간 커플의 발자국이 유일한 표지판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못하겠다.
알음알음 발자국을 좇아 정상에 도달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더이상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추위가 극에 달해 일단 움직였다. 올라온 길의 반대쪽으로, 무작정 발을 내디뎠다.
눈이 쌓여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땅인지 분간되지 않는 사면을 더듬거리며 내려가다가,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이렇게 가파르고, 사람의 흔적이 없을리 없었다.
다시 위쪽으로. 뒤돌아 한 발을 올려 디디는 순간, 경사는 더 날카로웠고 눈은 더 미끄러웠다. 자칫하면 미끄러져 조난당할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아찔했다. 눈 사이로 드문드문 솟은 큰 바위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몸을 끌어올렸다.
가까스로 올라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제야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정상에서 왼쪽 능선을 타고 우회해야 했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폭이었고, 오른쪽은 가파른 절벽이라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한참 능선을 걷다 보니, 스무명 남짓한 중국인 단체와 마주쳤다. 죽음의 공포와 고독 끝에서 마주친 타인의 존재가 큰 위안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하산은 수월했다. 정상에서의 공포가 강렬했던 탓인지, 내려오는 길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약간의 우박을 맞으며 걸음을 재촉해 2시 20분경 르사피유에 도착했다. 때마침 검정 밴택시에서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내려 나를 반겼고, 안도감과 함께 택시에 몸을 싣고 시내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