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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진 Jul 03. 2021

‘균형’이라는 동사

균형 잡힌 삶은 없다. 균형 잡힌 삶의 순간들이 있을 뿐.

나이가 들면서 우리들의 삶은 복잡해진다. 어렸을 땐 심플하던 세상이 나이를 먹을수록 살과 군더더기들이 붙어 얽히고설킨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시답잖게 아는 것이 많아져 욕심이 커지고, 맺게 되는 인연이 많아져 고뇌가 쌓이고, 역할과 책임이 많아지니 정신없이 고단한 하루가 계속된다. 그렇게 어느새 나는 내 삶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버리고, 내가 시간을 온전히 운영하지 못한 채 세월이 내 삶을 듬성듬성 메우고 만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를 수밖에.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면 거울 속의 나는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제야 떠오르는 단어란 결국 '균형'이다. 하지만 이 균형 잡힌 삶이 애초에 가당키는 한 말인지 의심스럽다. 균형 잡힌 삶을 살려면 말 그대로 먼저 균형을 잡는 행위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한번 균형을 잡았다고 하여 그 균형이 깨지지 않고 유지되기는 불가능하다. 특히 우리들 인생처럼 수많은 변수와 불가항력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워라밸’이라는 무책임한 말


최근 몇 년 간 사회적인 화두였던 ‘워라밸’, 즉 '일과 삶의 균형'은 이제 대다수 직장인들이 중시하는 가치로 자리 잡았다. 나는 워커홀릭도, 내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며, 오히려 야근을 물리도록 해본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왜인지 ‘워라밸’이라는 단어는 늘 어딘가 불편했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밸런스', 즉 '균형’이라는 말에 있었던 것 같다. 균형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어렵고 복잡한 의미를 ‘워라밸’에서는 너무나 단편적이고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저 무 자르듯 하루 8시간 일하고, 퇴근 후 일정 시간을 나에게 쓰면 당장 인생에 균형이 잡히고 행복해질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균형은 그리 쉽게 잡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내게 ‘워라밸’이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불친절하게 다가왔다.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달라. 분명히 말하지만 삶에서 일을 하지 않는 시간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 글의 주제는 삶의 균형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탐색하는데 있지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무엇이든 ‘균형’이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양쪽 시소에 서로 다른 대상을 태워야 한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무엇이든 반대되는 대상을 갖기 마련이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또는 자본가와 노동자,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보수와 진보, 사회적으로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는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 역사적으로도 인류는 늘 반대되는 두 가지 사이에서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고 이를 해결하며 변화와 성장, 발전을 거듭해 왔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눈에 보이는 사물이든 보이지 않는 정신이든 어떤 대상이 있으면 그에 반대되는 무언가를 가져와 경쟁을 붙이고야 마는 본능을 타고난지도 모르겠다. 헤겔이 변증법을 통해 주창한 정, 반, 합의 원리도 이의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는 아닐까.


‘워라밸'에서는 일과 삶이 양 끝의 대척점에 놓인다. 내 '삶'과 반대편 시소에 앉은 '일'은 그래서 내 '삶'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무의식적으로 일을 부정적인 대상, 내 삶의 즐거움을 빼앗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굳이 ‘일’을 그렇게 미워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한평생 지고 가야 할 존재라, 그러지 않아도 이미 애증의 대상인데 말이다. 삶과 일이 서로 다른 저울 위에 있다면, 일을 하는 동안의 내 삶은 나의 인생이 아니고 무엇일까? ‘일하는 나’는 ‘내’가 아닌가? 일과 삶은 앞서 열거한 반대 개념들과는 분리의 기준과 층위부터 다르다. ‘일’은 ‘삶’의 부분집합이지 별개의 원이 아니고, ‘삶’은 ‘일’의 여집합이 아니다.


무엇보다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한 건 일의 비중이나 내가 쏟는 시간을 조절하는 것 이상의 복잡하고 동시다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양쪽을 반으로 나눈다거나 ‘중간’을 지키는 것이 균형은 아니다. 의미를 오해해서 균형을 잡기 위해 무엇이든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 있고자 한다면 오히려 삶의 순간순간이 애매모호함과 혼란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균형'이라는 말은 이보다 훨씬 어렵고 심오한 말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도 했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 불교의 중도처럼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에서도 균형은 언제나 지키고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균형’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각자의 무게중심은 따로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직을 이끌어가는 경영진들이나 사회적/경제적으로 소위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었다. 굳이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구든 책이나 각종 미디어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기도 하다.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공통점은 한결같다. 그들에게 통상적인 의미의 ‘워라밸’ 같은 건 없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적어도 ‘워크=라이프’ 여야 한다. 그 정도의 노력과 집념, 치열한 집중과 헌신 없이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성공 노하우는 ‘균형이 깨진 삶’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 삶에는 그들 나름의 원칙과 기준이 있었을 것이고, 각자에게 '의미 있는 균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들의 집합과 축적이 그들 삶 속에서 나름의 균형을 만들어가고 있을 테고, 이런 노력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일이 주는 성취감과 만족감, 또는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면, 자연스레 그와 관련된 것들에 가장 많은 시간과 관심을 할애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거나 나의 개성을 표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라면 그에 관련된 순간들을 삶에서 더 많이 만들어낼 것이다.


따라서 '균형'은 누구에게나 정답처럼 존재하는 어느 한 지점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관과 살아가는 모습에 따라 존재한다. 각자의 무게중심은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들 삶의 모습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고, 그 삶 속에서 각자가 중요시하는 가치들은 모두 제각각이며, 가치 판단이 필요한 상황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소에는 일과 취미가 올라타 있을 때 또 다른 누군가의 시소에는 가족과 친구가, 누군가에게는 공부와 연애가 올라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일과 또 다른 일이 양쪽 시소에 올라갈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양쪽 시소에 올라간 대상은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애주기나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교체되고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즉, 각자가 중요시하는 가치들이 삶의 어떤 지점마다 필요에 맞춰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매 순간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경중과 밀도를 조율해 가며, 계속해서 최적의 무게중심을 찾아나갈 때 비로소 균형이라는 말은 성사된다.


그래서 하루 8시간 일하고 3시간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다고 워라밸이 좋고 균형 잡힌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자꾸 '워라밸'을 언급하는 이유는 '균형'을 단순히 물리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균형은 시간의 균등한 활용만으로 만들어지지도, 무게나 질량 같은 것들의 똑같은 분배로만 이뤄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게 균형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쉽고 편리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 인생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균형'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시소의 목적은 양쪽의 무게 차이에 의해 오르락내리락할 때 느껴지는 스릴과 재미에 있다. 억지로 양쪽의 무게를 맞춰 그 누구도 땅에 발을 닿지 않게 하려는 노력은 시소가 지겨울 때 잠깐씩 하는 놀이일 뿐, 그렇게 하자고 시소를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저울에 달듯 양쪽 무게를 맞춰 움직이지 않는 시소는 있을 수도,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한편, 한쪽이 너무 무거워도 탈이다. 어렸을 때 나보다 훨씬 더 육중한 친구와 시소를 타게 되면 단숨에 무기력하게 하늘 위로 올라가 내려올 수 없었던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럴 때면 무게가 더 많이 나가는 친구가 의도적으로 발을 힘차게 굴러 위로 올라가 줘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시소 타기가 가능하다.


결국 우리 삶의 균형을 위해 필요한  평형을 이룬 시소가 아니라, 시소를 시소답게 만드는  ' 구르기'이다. 복잡한 우리들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양쪽 무게를 똑같이 맞춰 움직이지 않는 시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소가 '계속 위아래로 움직일  있도록' 양쪽의 무게를 시시각각 적절히 가감해주고 끊임없이 힘차게 발을 구르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균형'이라는 말은 언제나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머무는 순간, 균형은 깨지고 만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수많은 역할과 책임들 속에서 한평생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매일 중심잡기를 하며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한, 적절한 무게중심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인생에 정답은 없다. 모두에게 똑같이 바람직한 인생의 모습도 없다. 그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소가 적당한 속도와 리듬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발 구르기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최적으로 운영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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