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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진 Apr 08. 2023

확률보다는 가능성의 삶을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은 끊임없는 확률 게임인 것 같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 없는 인생에서 확률적으로, 통계적으로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을 따라 모두가 해바라기를 하며 살아가는 건 어쩌면 필연적이다.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하면 더 좋은 학교에 갈 확률이 높아지고, 더 좋은 학교에 가면 더 좋은 회사에 갈 확률이 높아지며, 더 좋은 회사에 가면 더 많은 돈을 벌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돈을 벌면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자유롭게 사고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고, 어쩌면 이런 삶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아니 더 높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에 가장 큰 위험과 동시에 좀 서글픈 인생의 법칙이 도사린다. 결국 우리는 더 행복해질 확률을 믿고 그것에 인생의 모든 것을 베팅하고 만다.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고, 성공을 행복의 동의어로 쉽게 착각하는 우리들은 더 행복해지리라는 기대에 더 많은 돈을 벌길 원하고, 더 많은 돈을 벌 확률을 높이기 위해 더 좋은 회사와 학교에 가길 원하며, 이를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유되는 성공과 행복의 척도, 그로 말미암은 기형적인 사교육 열풍은 그저 ‘확률’을 높이기 위한 몸부림이자 기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저 확률을 높이기 위한 행위라면, 우리 인생은 그 자체가 확실치 않은 것에 삶 전체를 베팅하는 가장 큰 도박이 될 수밖에 없다.


도박은 비록 내가 져도 망가지거나 화나지 않을 정도로 베팅해야만 즐길 수 있는 ‘오락’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도박 같은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세상이 정의하는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억울하게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불확실한 확률을 위해 내 삶을 다 던진 후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삶의 패배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애초에 삶을 도박처럼 살지 않는 것이지만, 슬프게도 같은 사회와 제도권 안에서 전형적인 교육과 사회화의 과정을 거친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배워온 '확률 게임'에 삶을 베팅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배운 적이 없다. 우리를 가르친 이들 또한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아는 대로 전수해 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삶의 방식은 대대로 이어져왔다.


그렇다고 삶을 비관하면서 어쩔 수 없으니 베팅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말은 아니다. 성공이나 행복의 정의는 인간의 개체 수만큼 많을뿐더러, 세상이 정의하는 성공으로 가 닿는 길 또한 세상이 정해놓은 트랙 외에 훨씬 다양하고 창의적인 길들이 있음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트랙은 그저 통계적, 경험적으로 확률을 조금 더 높여주는 길일뿐이다. 그러니 지금 달리고 있는 트랙에서 조금 벗어나거나 애초에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달리고 있는 트랙의 성공 확률이 더 높은지 아닌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니 알 수도 없을뿐더러,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와 지혜와 노력이 있는 한 '가능성'이 없는 트랙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확률(probability)이 0%에서 100%까지의 정도를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가능성(possibility)은 Yes or No로 표현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위 성공을 향해 한 방향으로 함께 달리는 길은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은 물론이고 성공 확률 또한 높은 길이라고 믿는 길이다. 이미 많은 사례들이 있고 그 사례들이 하나의 성공 스토리로 사람들 사이에 신화처럼 떠돌며 믿음을 공고히 했으니 소위 '검증된'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단편적으로 명문대학교의 경쟁률이 그렇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직장의 취업문이 그렇다. 제로섬 게임이다. 통과만 할 수 있다면 소위 성공한 삶을 살 확률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게 내 삶이 될 확률은 반대로 낮아진다. 같은 길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이미 길목은 너무 붐빈다. 트랙 자체의 성공률은 높지만 개개인이 그 트랙을 잘 통과할 확률은 낮아지는 것이다.


반면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은 어떤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길이니 성공 확률은 낮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능성까지 없지는 않다. 대다수가 선택한 길과 다른 길일뿐 틀린 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가능성만 있다면, 그때부터 확률은 조금 더 나의 몫이 된다. 같은 길을 가는 경쟁자, 즉 분모 수가 줄어든 만큼 조금 더 나라는 개인에 의해 확률이라는 결괏값이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역사적으로 늘 주변의 환경을 많이 받으며 살아왔고 남들과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름으로 인해 집단에서 도태되거나 낙오할 것을 무서워했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자연스럽게 '확률의 삶'을 살도록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인류 사회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발전된 사회는 더 많은 다양성과 포용력을 품기 마련이다. 기술의 발달은 전통적인 성공 방정식을 따르지 않고도 성공하는 사례들을 전례 없이 많이 만들어 내고 있고 이는 우리 사회와 문화 전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무엇보다 성공의 정의 자체가 점점 더 개인화되고 다양해지고 있다.


이는 곧 확률보다는 가능성에 좀 더 베팅을 해도 괜찮아지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실로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걸고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내가 정의하는 성공으로 데려다줄 가능성이 있는 길이라면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도전해 봐도 괜찮을 것 같다. 가능성에 베팅했다가 설령 실패하더라도 이미 내가 원하는 길로, 내 방식대로 가보았으니 삶의 패배자가 될 만큼 억울한 도박은 아닐 것이다.


이미 확률 게임으로만 채워온 삶의 한가운데 있는 나로서는 '가능성의 삶'을 살자는 말이 사실 쉽지는 않다. 이 글은 어쩌면 그럴 용기와 대담함이 없는 나에게 쓰는 격려와 다짐 같은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직 가능성의 삶에 베팅해 볼 시간이 훨씬 많은 누군가에게, 또는 새로운 도전의 출발선 바로 앞에서 등 떠밀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원치 않는 확률 게임에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 허우적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작게나마 격려와 용기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확률이 높진 않겠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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