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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ug 06. 2020

엄마와의 통화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못다 한 이야기를 후회하기보다는 추억이 더 많기를.

엄마와 나, 우리 사이에서 전화를 하는 쪽은 일방적으로 나였다. 열 번 통화를 하면 아홉 번은 내가, 한 번 정도는 엄마가. 그 한 번도 내가 안 하면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마음에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통화는 사실, 일상의 공유보다는 안부 차원이었다. 엄마 아빠는 대구, 나는 서울. 우리가 떨어져 산지도 15년이 넘었고, 서로의 평범한 하루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전화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 탓이었다. 그런 의무감(!)은 딸인 내가 더 가지는 게 당연한 일. 자연스럽게 전화하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다.


우리의 통화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 대부분 내가 전화를 거는 쪽이었으므로 원칙은 내 마음대로 정했고, 엄마는 내 전화를 받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그 룰을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저녁 7시 30분 전후로 통화한다.

쭉 대구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엄마 아빠는 내가 서울말 쓰는 것을 못 견뎌했다. 나는 이해했다. 나 역시 처음 서울에 와서 ‘밥 먹었니?’라고 물어보는 그 말투는 듣고 또 들어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으니까. ‘먹었나?’에서 ‘먹었니?’로 글자에 점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억양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래서 서울말을 쓰며 일하는 시간에는 통화를 하기가 곤란했다. 사투리를 쓴다고 눈치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신기하게 반응하는 것이 나는 불편했다. (내 서울말이 그 정도로 완벽했나?) 그냥 경상도 사투리를 쓰게 된 나로서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경상도 사투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끝에는 ‘오빠야’라고 한번 해봐 달라는 애교 섞인 요청이 있기도 했다. 물론 쿨하게 패스했지만! 저녁 7시 30분이 주 통화 시간이 된 것은 퇴근 후에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시간에도 일을 할 때가 많았지만 덜 주목받았으므로 그때는 마음껏 사투리로 통화할 수 있었다.


우리는 평일 주 5일 통화를 하고 주말은 쉰다.

이것이 처음부터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룰이 된 것은 아니었다. 퇴근을 하면 통화를 했던 습관 때문에 쉬는 날에는 종종 깜빡했고, 그게 반복되다 보니 주 5일 통화제처럼 돼 버렸다. 때문에 주말을 건너뛰고 월요일에 전화를 하면 엄마는 ‘오랜만이네 딸’이라고 했고, 나는 ‘고작 이틀인데 무슨 오랜만이야?’라고 무심하게 받아쳤다. 평일 5일 통화 미션이 클리어가 안됐을 때는 주말에도 가끔 전화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주말에는 전화 안 하잖아, 무슨 일이야?’라며 룰의 예외를 짚어내는 엄마를 보며 ‘역시 엄마는 나(의 룰)에 대해 너무 잘 알아’라는 생각도 들었다.


통화는 보통 2분을 넘지 않는다.

사실 통화 시간이 2분을 넘지 않는 건 원칙이었다기보다는 지난 10년 이상의 통계 결과다. 거의 매일 통화하다 보니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밥은 먹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서로 알려야 할 사항은 있는지. 그게 다였다. 가끔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할 때면 2, 3분 정도 추가되기는 했지만. 계속 같이 살았다면 매일 듣고, 절대 3분으로 끝나지 않았을 이야기니까 전화로 듣는 그 정도의 잔소리는 참을만했다.


전화를 끊을 때는 ‘사랑해’라고 말한다.

큰 레퍼토리 변화 없이 이어지던 우리의 통화에 생긴 가장 큰 변화라면 마지막 말은 언제부턴가 ‘사랑해’라는 말로 끊는다는 것 정도? 아, 그러고 보니 엄마가 만든 유일한 룰이 ‘사랑해’로 끊는다는 것이구나.


처음 엄마가 사랑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던 날, 기분이 좋았다기보다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갑자기 왜?’라는 생각만 들었다. 사랑해라는 말이 불안함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드라마와 영화에서 말고 내가 직접 느껴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던 생각은 ‘혹시 건강검진 결과라도 나왔나?’였고. 상상의 나래를 혼자 펼치다가 고민 끝에 다시 전화한 내게 엄마는 그냥 하고 싶어서 한 말이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다짐했다.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해야겠다고. 사랑해라는 말이 더 이상 불안하게 들리지 않도록 말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매일 고백했다. 사랑한다고.


엄마는 왜 전화를 먼저 안 할까 궁금했던 적도 있다.  그때마다 엄마는 ‘네가 하잖아’라고 했는데 나는 괜히 심통 나서 엄마가 할 때까지 먼저 안 할 거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었다. 그제야 엄마는 ‘전화요금 많이 나오잖아’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공짜라고 말해도 엄마는 내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엄마의 핸드폰 요금은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가 다른 자식들처럼 필요할 때 편하게 쓰라고 카드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용돈을 척척 주는 것도 아니고, 통신료 그거 얼마 한다고 그게 미안해서. 그동안 엄마는 얼마나 많은 말을 담고만 있었던 걸까 싶어서 짠하고, 안쓰러웠다.


요즘 들어 엄마가 낮에도 전화하는 일이 부쩍 많아졌고, 통화 시간도 두 배 이상 길어졌다. 단지 무료 통화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마는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한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야기할 사람이 나밖에 없단다. '엄마도 참,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가 엄마에게 친구가 몇 명이 남아 있고, 언제든지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그중에서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보고 머쓱해졌다. 그나마 20년 넘게 매일같이 보던 동네 친구들과도 1년 전에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같이 살던 빌라 재개발 문제로 모두들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새로 이사한 집은 아파트인 탓에 젊은 층이 많이 살아서 또래 친구를 다시 사귄다는 것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엄마의 유일한 낙이었던 노래 교실도 ‘그놈의 코로나’때문에 나갈 수가 없게 됐으니 대화 상대가 있을 리가.


엄마는 나처럼 엄마도 없으니까 얼마나 외로울까. 이제부터라도 내가 엄마에게 수다 친구가 되어줘야겠다는 후회 섞인 결심을 했다. 더 좋은 거, 큰 거는 못해줘도 매일매일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엄마! 어제 했던 이야기 오늘 또 하고, 아마 내일도 또 하겠지만 나는 괜찮아. 내가 바라는 건 엄마의 수다가 그리워질 날. 못다 한 이야기를 후회하기보다 추억할게 조금이라도 더 많았으면 좋겠어. 아, 그래도 결혼하라는 잔소리는 좀... 줄여... 아니야, 나는 뭐든지 (귀로) 들어줄 준비가 됐어. 이따 통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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