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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Nov 08. 2022

나 때문에 선배가 메인작가님에게 호출당했다.

        프로그램마다,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4초가 내레이션을 쓰냐, 마냐의 경계를 가른다. 프로그램 스타일이 다큐에 가까울수록 여백은 그대로 남겨지기도 하고, 생활 정보 프로그램일수록 4초 이하의 시간일지라도 내레이션으로 아예 빈틈을 없애기도 한다. 그날 내가 써야 했던 원고는 휴먼 다큐 성격의 내레이션이 필요한 15분짜리 VCR. 여백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대본이었다. 이제 딱 20초, 마지막 20초만 쓰면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20초를 잘 쓸 방법 아니, 막무가내로라도 문장을 채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880초의 다른 파트를 공백과 문장으로 채우고 마지막으로 남은 장면은 프로그램 주인공인 게이 남성이 게이클럽에서 처음 만난 남성과 이내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클럽에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일. (아마도?) 문제는 그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 내가, 생애 처음으로 목격하고 경험한 ‘쌩(!) 리얼 부킹’이었다는 것. 클럽에 가 본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하고, 때문에 부킹을 한 적도 없는 나로서는 그 상황을 ‘일부 공감’하는 게 고작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적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지적 주인공 시점의 내레이션으로 출연자의 내면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해 공감을 이끌어내야 함에도 주인공의 마음을 ‘전지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장벽에 가로막혀 몇 시간을 헤매고 있었다. 메인 작가님에게 대본을 컨펌받아야 하는 시간이 오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채운 최초의 문장은 이랬다.



 ‘드디어 J가 한 남자를 만났다. 호감을 표시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은 거침없이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한다. 또다시 언제 올지 모르는 이 시간에 집중하면서... 이곳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후에 전해 듣기로는 이 문장을 확인한 메인 작가님은 내가 아니라 나를 그 프로그램으로 데리고 간 바로 위 선배를 호출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당시 내가 직접 메인 작가님에게 받은 피드백은 그림이 정말 날 것 그대로니까, 장면을 눌러줄 수 있는 ‘고급스러운’ 내레이션을 쓰라는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보면 메인 작가님이 왜 선배를 호출했는지 뻔히 보인다. 눌러주기는커녕 더욱 자극적으로 쓴 문장. 앞으로 남은 11회 대본을 나에게 맡길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으리라. 하지만 그때는 메인 작가님의 피드백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겨우 5년 차 작가에 불과했고, 그때까지 생활 정보나 연예 뉴스, 연예인 일상 팔로우 VCR만 써봤기 때문에 보통 10년 차 전후, 적어도 7, 8년 차 작가들이 담당하는 휴먼 다큐에서 장면을 눌러줘야 한다는 것이, 고급스러운 내레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 문장 한 문장 선배들에게 배워가며 고칠 시간은 없었다. 그러니 말썽뿐인 문장을 수정토록 한 건 선배들도, 나도 아니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더빙 시간 그 자체였다. 어찌어찌 내 원고는 온에어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나는 프로그램 내 다른 코너 담당으로 변경되었다.      


        담당 코너가 바뀌고 맞는 첫 전체 회의 시간. 나는 무척이나 풀이 죽어있었다. 잘 쓰지 못하는 내가 작가로서 무능력하게만 느껴졌고 나보다 연차도 높고, 경험도 많아서 더 잘 쓸 거라고 기대를 받는 새 작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어쩐지 창피했다.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프로그램 메인 PD이자 팀장이 새 작가에게 연신 당부했다.

     

- 그래서 제가 작가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코너는 내레이션이 고급스러워야 돼요.     


        아, 팀장님은 나를 두 번 죽이는구나. 잔뜩 자존심이 상해서는 그만둔다고 말할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그때였다.      


- 1회 보시면 클럽에서 그런 내레이션이 나오거든요.     


         ‘팀장님 제발 그만요! 저도 거지 같이 쓴 거 안다고요’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확인 사살하려는 그를 피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건,
언제 올지 모르는 인연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 헐... 대박!


        팀장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분명 나 혼자만 아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10시간을 꼬박 고민하다 시간에 쫓겨 완성한 문장. 그런데 더빙 대본 없이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내가 쓴 문장 그대로를 그가 읊었다. 문장을 외운 것이었다.      


- 현진! 그 문장 너무 좋았어!

  작가님 아셨죠? 그런 문장으로 써주세요     


        계속 그런 문장(!)으로 그 VCR 더빙을 쓰게 된 것은 새로 온 작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회의가 끝난 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바로 그만뒀다. 결국 그 코너는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작가적 자존심은 그가 내 문장을 그대로 낭독한 순간 바로 원상복구 됐고, 나는 그 코너를 다시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좀처럼 10시간 넘게 고민하는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매회가 사투 아닌 사투였다. 3개월 후, 프로그램 종영으로 고단했던 나의 글쓰기 전쟁도 끝이 났다.      


         메인 작가님에게 호출을 받은 선배는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전말을 비밀에 부쳤다. 나 때문에 자신이 혼났으면서도. 종방연 때가 되어서야 내게 말해줬다.      


- 사실은 그때 메인 선배가 그랬어.

  네가 잘 쓴다고 하지 않았냐.

  그런데 이게 뭐냐고.

  네가 데리고 왔으니 네가 책임지라고.      


        몇 달 전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부끄러움이 밀려와, 얼굴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얼굴이 붉어진 건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팩트 폭행 때문이었다. 내 원고가 형편없는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였을 줄이야.     

 

- 팀장님 말이 맞았어.

  네가 잘 쓰게 될 거라고 새 작가 뽑지 말고,

  그냥 너한테 맡기자고 했거든.     


        전혀 몰랐던 일이다. 내가 우리 팀에 그렇게 골칫거리였구나...      


- 그런데 나는 내 코너도 해야 되는데

  네 대본까지 봐주기는 힘들어서

  그냥 새 작가 뽑자고 했어.

  나는 대본 한 번 봐준 적이 없잖아.

  그런데 네가 점점 더 잘 쓰는 게 보이는 거야

  미안하고, 고마웠어. 고맙다 현진아.     


        맹세컨대, 선배에게 칭찬을 들을 만큼 내 글솜씨가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진 않았다. 그래서 매번 그만두겠다고, 나한테는 역부족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맺혔는데도 도로 집어넣었다. 못다 보여준 내 실력을 반드시 증명하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 박히는 문장이 아니라 전파를 타는 순간, 세상에서 사라지는 글. 실은 나도 잊고 마는 내 문장이 한 번쯤은 더, 누군가의 기억에 남도록 하고 싶었다.     

 

        어쩌면 880초를 채운 다른 문장은 언급할 가치도 없을 만큼 별로였고, 그나마 20초를 대신한 그 한 문장만이 그럭저럭 봐줄 만했을지도 모른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 한 문장을 보고, 나를 믿고 지지해준 그가 고마웠다. 덕분에 버틸 수 있었고 지금은 종종 잘 쓴다는 말을 듣기도 다. 그러나 내 문장을 완벽하게 기억해준 사람은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었다. 여전히 문장에 자신이 없어질 때면 그가 해준 말이 쪼르륵 달려와 귓가에 매달린다.


'현진, 그 문장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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