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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Nov 16. 2022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

 사람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거야. 순간순간 잘 살아야 되는 이유지. C선배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서늘했어. 살아오는 동안 어느 세월의 갈피에서 헤어진 사람을 어디선가 마주쳐 이름도 잊어버린 채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을 때, 그때 말이야. 나는 무엇으로 불릴까? 그리고 너는?     


- 신경숙의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     



        오래전 저 책을 읽는 동안에도 생각했고, 계속 고민했지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답은 얻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늘 실수를 하고, 가끔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서 후회나 자책으로 며칠을 채울 때가 있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과거사 이슈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때면 습관처럼 나는 저 글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물어봤다. 특히 현재의 나보다는 과거의 나에게 ‘너 잘 살았니?’라고.     


        ‘언니, 언제부터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이었어요?’ 언젠가 나에게 고민상담(?)을 받은 후배가 그날의 나를 <한 줄 평> 했던 말. 보통 이런 말들은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심이지만 후배의 말은 농담보다는 99% 진심에 더 가까운 말이라는 것을 그녀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비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던 말. 아마도 그건 감격 내지는 부러움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순간 움찔했다. 아마도 나 스스로가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많았던 탓이었을 것이다.    

  

        후배의 말이 맞다. 나는 두 부류 중 한 부류에 반드시 속해야 한다면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사람에 속했다. 그래서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먼저 보였고, 성격까지 급해서 순간적으로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았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는 사람.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이 신경질적이라거나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그때만 해도 전혀 몰랐다. 후배는 한 시절 속 과거의 나를 불러온 것이다. 부끄럽기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예전보다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했구나 싶어서.     


        내가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뀌기 아주 한참 전, 나와 파트너가 되어 여러 달 함께 고생한 PD가 쫑파티 자리에서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러고서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와 일하는 동안 내가 한순간도 눈치 채지 못한 마음이었다. 그만둔 전임자로부터 인수인계받을 때 나에 대한 여러 주의사항(?)을 들었고, 그로 인해 내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합을 맞춘 첫 번째 PD가 아니라 두 번째 사람이었다. 첫 파트너는 첫 방송을 앞둔 시사에서 만족할 만한 편집을 보이지 못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뒀다. 그 직후에 그가 왔다. 여러 난관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프로그램을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그날은 그것을 자축하는 의미의 자리이기도 했다. 하필 그런 날, 지금까지 몰랐던 진실을 굳이 꺼내는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솔직히 너무 당황스러웠다.     


        적당한 대꾸가 생각나지 않아 그저 표정관리만 하던 찰나 그는 대뜸 미안하다고 했다. 막상 겪어보니 ‘진국’인 좋은 사람인데, 자기가 선입견을 가지고 오해했다며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다고. 그리고 사과를 받아준다면 다음 프로그램도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도. 그 순간, 아까까지 속상함에 가슴팍을 오르락내리락 씩씩대던 마음이 이내 휴, 하고 풀리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 조용히 착지했다. 나에게 들킨 적 없는 진심이니 그냥 넘어갔어도 될 일을 기어이 사과하고 마는 그를 보면서 나를 색안경 끼고 보아 왔던 그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혼자 흐뭇해했다. 나는 사과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그가 불필요하게 들고 있는 마음의 짐을 덜어냈다.     


        그 말고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진국’이라는 말로 나에 대한 설명을 대신할 때가 있다. 한때는 알고 보면 더 나쁜 사람이 아닌 게 어디냐며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던 말. 하지만 그만큼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나를 오해만 할 사람들도 많다는 의미다. 그에게 나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준 전임자처럼.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너 잘 살았니?’라는 질문에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 나름대로는 잘 살기 위해 노력했고, 대체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어떤 순간순간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많은 시간, 함께 일을 하거나 관계를 맺으면서 생기는 문제에 대해 공동의 책임이 아니라 마치 시소를 타는 일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나를 향한 ‘일부’ 아쉬움의 말들에 그 누구도 ‘오로지’ 내지는, ‘전부’ 라거나, ‘모두’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내 마음대로 그 단어들을 무조건 갖다 붙여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이 되고 말았다. 그랬던 나로 인해 오직 내가 탄 시소만 하강하던 것뿐이었는데, 상대의 책임이 더 무거워지기만을 바라면서 할퀴는 말들을 끝도 없이 반대편으로 쌓았다. 1cm라도 내 시소가 더 높이 떠 있기를 바라서였다고 하지만 돌아보면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기필코 땅에 닿게 만들겠다는 자세였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나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 순간순간 잘 살아야 된다. 그리고 ‘잘 사는 것’이란 나에 대한 한 사람 한 사람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지나온 시간이나 앞으로의 시간에 내가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가에 더 집중할 때 풀릴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설령 사는 동안 순간순간 떳떳하지 못한 나를 만나게 되더라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 때, 내일의 내가 오늘 나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잘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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