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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Jan 02. 2023

브런치에 쓰면 뒷담화(!)도 에세이가 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나의 이야기고, 어디부터는 당신의 이야기일까.

        글 쓰는 일은 오직 나만을 위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내가 살면서 하는 가장 이기적인 행동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글에 등장하는, 또 내 글을 읽게 되는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철저히 내 멋대로만 쓰고 있는가, 묻는다면 용감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내 글은 때로 너무 쉽게, 호불호가 크지 않아 대중적인 반면 엄청난 매력을 지닌 것도 아닌 프랜차이즈용 글이 되기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배려를 했다고 해서 내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온전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 아니, 받아야만 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내 글에는 나(의 생각)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오롯이 나만의 시선으로 내 글에 묘사되는 사람들. 그래서 처음에는 글(실력)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마음속으로는 강렬하게 공감이나 칭찬, 또 어쩌면 사과를 얻고 싶으면서도 그에 따르는 부정적 평가나 반론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 글에 본의 아니게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 글을 공개하는 이상 둘 중 하나만을 취하는 취사선택은 불가능했기에 비밀리에 글을 썼다.


      

         5만, 10만 조회수가 폭발하던 어느 날. 신기함이나 기쁨보다 불안함이 크게 자리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그 사람이 보면 어쩌지?’ 그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가슴에 손을 얹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내 생각을 썼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 단지 동의 없이 타인의 이야기를 써서? 그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이건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잖아?     


        나의 이야기를 쓴 것이 맞다. 아직도 그 생각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다. 하지만 생각의 순서를 바꾸면 내가 왜 물음표로 합리화했는지 알 수 있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잖아!’ 만약 당사자가 왜 자신의 얘기를 내 마음대로 재단해서 쓰는 거냐고 항의해온다면 나는 뭐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를 납득시켜 공감이든, 칭찬이든, 사과든, 아니면 그 무엇이라도 이해받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직접 말을 하지, 그 사람 모르게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SNS에 쓰면 신세타령이나 험담, 감성글이 되고, (브런치에) 기승전결을 갖춘 장문으로 쓰면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털어놓기로 한 거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브런치에) 글 쓰는 일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들을 동경했으며 내 글 실력과 상관없이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내가 특별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 순간을 위해서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도 썼다.      


- 내 얘기도 썼어?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은데

  그러면 글 쓰는 데 방해될까 봐 안 물어보려고.     


        사전에 말하지 못했지만 내 글에 이미 여러 차례 등장한 앨리스 언니는 내가 브런치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아는 것을 넘어 이해까지 해주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쓴 글이 뭐라고... 그때만 해도 내 글을 지인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타인을 함부로 재단’한 책임 회피,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연말, 이 고백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타인을 멋대로 재단한 책임이 아니라 실은 나 자신을 한껏 포장하고 방어한 문장들이 부끄러웠던 것은 아닐까. 내가 쓴 글 속의 내가, 자신들이 아는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어떡하나? 도저히 완전무결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을 위해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을 위해 쓴다고 말하겠다. 그런데도 자꾸 욕심이 난다. 나는 상당 부분 글을 씀으로써 치유받는다. 그러나 내가 치유받기 위해 쓴 글이 누군가의 상처가 되는 건 싫다. 정말 헛된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이해받더라도 이해와 공감의 폭이 우리 서로가 다르고, 같다고 해도 무한대는 아니므로.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 그러므로 완전하게까지는 아니어도 내 모든 노력을 다해 당신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최선입니까?’라고 당신이 묻게 된다면 전적으로 내 잘못이 맞다. 아쉬움, 억울함 내지는 서운함을 토로하는 당신의 도,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나만큼이나 쉽지 않았을 한 마디. 수없이 자신에게 묻고, 나를 배려한 끝에 보여주는 진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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