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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Feb 12. 2024

마음대로만 하고 살면 결국엔 마음대로 살 수 없더라.

크리스마스트리가 갖고 싶어서_12

        지난 두 달여, 전에 없었던 '일생일대의 대청소 사건'을 겪으면서 분명히 같은 하나의 나인데, 나도 나를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전부터 알던 나, 그러니까 내가 가진 게으름과 귀차니즘은 평생 안고 가야 할 반려 숙제로 여기고 있었다. 다만 그 정도가 내 기억 속에서 상당히 미화되어 있었고 실제는 다소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내가 당혹스러웠던 건 이 일로 새로이 알게 된 또 다른 나였다. 순순히 따르기만 했던 나였는데, 이제는 게으름과 귀차니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내 안의 욕망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이 정도였다고?'와 '이게 나이고 싶다고?'의 무한 반복. 청소를 하면 머릿 속도 깨끗이 정리된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왜 혼란스럽지?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주방 정리에 돌입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이번에 무생채를 만들기 위해 스테인리스 채칼을 샀다. 그런데 싱크대 상부장 맨 꼭대기 수납 바구니에 떡 하니 몇 년 전에 구입한 채칼을 모셔두고 있는 게 아닌가. 이번이 네 번째 무생채.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앞서 세 번의 무생채 만들 때 사용했던 플라스틱 채칼이었다. 당연히 없다고 생각했는데, 귀하게 모셔둔 거라니... 한심하다. 그 옆과 옆옆 수납 바구니를 확인하고 나서 그 한심함은 더 해졌다. 하나는 텀블러만 보관해 둔 바구니. 다른 하나는 반찬통을 보관해 둔 바구니.


        텀블러는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다. 한 동안 잘 사용하다가 한 동안은 다시 시들해졌고, 다시 텀블러를 필요로 할 때는 새로운 걸 장만했다. 그래서 수납바구니가 아니라 이미 밖에 나와 있는 텀블러도 세 개나 된다. 마지막으로 텀블러를 쓴 것도 벌써 두 달은 넘은 것 같다. 다시 찾아온 시들해진 시기인 것이다. 반면 반찬통은 있는 지도 모르고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종류로 사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맨 꼭대기에 있다 보니 시선이 거의 닫질 않아 어느 시점에서 존재가 완전히 잊힌 거 같다.  


        그 아래층 바구니에는 차와 커피를 마실 때 필요한 것들이 참 예쁘게... 그리고 소복하게 담겨 있었다. 뭐, 이제는 놀랄 것도 없지만 그것들의 존재도 바로 지금 알게 됐다.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하던 시절 매일 썼던 드립퍼와 종이필터, 선물 받은 찻잔 등. 어느 시절에는 내가 정말 아끼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커피메이커 시절을 지나 캡슐 커피를 마시게 된 지금까지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조용히 보관하고만 있었던 것이리라. 또 언젠가 다시 찾게 될 날이 올 거라 믿으며 너무 잘 숨겨둔 탓에 이제야 찾았나 싶고.... 는 무슨...


        가장 아래층 상부장에는 각종 비닐 위생백과 랩,  종이 포일 등과 맥주잔들이 자유롭게 사용 중이었는데 그 사이사이로 치즈가루와 갖은 MSG 양념 등이 빈 틈을 메우고 있었다. 함께 자리하고 있는 고추장처럼 원래 있어야 했던 하부장 공간이 부족해지자 하나둘 씩 이사를 해 온 것들이었다. 아무렇게나. 하부장도 바구니로 각가의 영역을 구분해 두었지만 완전히 무너져있었다. 식용유를 비롯한 각종 소스들. 프라이팬, 라면, 설거지 용품 등이 자기주장을 펼치며 바구니를 벗어나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다.


        싱크대 하부장 입주자들만큼이나 요란스러운 건 앞서 등장한 바 있는 그릇들이다. 이미 한참 전에 건조된 그릇도 말려지길 기다리는 그릇도, 자주 쓰는 그릇도, 어쩌다 한 번 쓴다고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지 않은 그릇도 모두 나와 시위 중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바가 자기를 제발 제대로 써 달라는 건지, 정리를 잘도 아니고 하는 척이라도 해달라는 건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 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서 나만 알고 있었다.


        단지 몸이 피곤했고, 그래서 집에서는 그냥 쉬고 싶었으며 그러기 위해 생각이란 걸 되도록 피했을 뿐이다. 때가 되면 언제든지 그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도저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다.


        마음대로만 하고 살면 결국엔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절실히 깨닫는다. 비로소 피어난 게으름과 귀차니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내 안의 욕망이 이대로 꺼지기 전에 주방 물건들과의 숨바꼭질은 오늘로써 완전히 끝내야 한다. 무조건! 기필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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