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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Sep 17. 2024

엄마가 딸에게 사무친 말.

   엄마는 왜 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는 걸까. 그것도 하루 이틀 전 일도 아니고 무려 초등학교 때 내가 했던 말을. 이 같은 의문을 갖게 되는 상황을 겪는 건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여러 아니, 수차례 있었고 그때마다 엄마가 같은 말을 반복했듯 나의 반응도 대체로 같았다.

엄마 언제 적 이야기야. 그리고 딸이 속상한 마음에 엄마한테 그런 말 좀 할 수도 있지. 그걸 아직까지 이야기하는 거야?

   미스터리한 엄마의 레퍼토리 등장 타임을 내가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뿐 대게의 등장 배경은 따지고 보면 비슷했다.

아까 엄마가 이렇게 하라며...

   엄마와 나 사이에 이미 발생한 상황은 내 뜻이 아닌 엄마의 뜻대로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내가 다시금 엄마에게 고지할 때였다. 그럴 때면 엄마는 한치의 지체 없이 이 레퍼토리를 다시 찾아와 나에게 반격했다.

너는 꼭 엄마 핑계를 댄다. 안 되면 다 엄마 탓이지? 초등학교 때 달리기 시합에서 꼴등을 하고 나서도 너는 그랬어. 엄마 때문에 꼴찌 했다고.

아니 엄마,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와.

지금도 네가 그러잖아. 나 때문이라고.

   나는 억울했다. 그 말을 했다는 당사자인 나는 전혀 기억도 하지 못할뿐더러 오직 엄마의 기억 속에 내가 그랬다는 증언 하나만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 탓만 하는 불효녀가 되는 것이 여간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과 그날의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길래 엄마는 매번 그 말을 지겹도록 찾아오고 또 찾아오는 것일까.

   같은 대화가 반복되고 다시 반복되고, 또 시작되는 일이 여러 번. 그럼에도 나는 끝내 엄마의 의중을 속시원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오히려 반복되는 그 순간이야 말로 나는 완벽히 엄마 탓을 하고 있었다. 딸인데도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엄마 탓이라고. 엄마가 어린 날 내가 한 그 말 하나를 꼬투리 잡아서 시시때때로 나를 공격하기 때문이라고.

      처음에는 딸로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내가 무정하게 느껴져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또 시작이네,라는 말로 엄마와의 갈등 상황을 일단락 지어버리곤 했던 나는 엄마 탓을 하는 것에 더 이상 어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됐다.

   어제 똑같은 말을 다시 들었다. 매번 그랬듯 또 시작이네 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막말로 내가 엄마에게 상처 준 말은 이것보다 더한 말이 분명 더 많은데 왜 엄마는 유독 '엄마 때문이야'라는 이 말만 잊지 못하는 걸까.

   달리기 시합 꼴찌를 하고서 엄마에게 달려간 내가 왜 굳이 엄마 탓이라며 울어버렸는지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엄마가 있지도 않은 말을 꾸며내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다. 엄마의 기억 속에 그토록 오래 자리 잡은 원망의 말이라면 분명 내가 한 말이 맞을 것이다.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정말 잘못이 엄마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쩌면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아주 어렸던 그때의 나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니까 나는...

   나는 도망가는 버릇이 있다. 비록 100미터 달리기는 20초 안에 들어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도망치는 데는 프로 선수급이다. 이 버릇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다, 눈치챈 것은 꽤 오래되었으나 그런 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인정하는 일에 계속적으로 도망 다녔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는 '나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아마 엄마가 증언하는 그날의 나를 비롯해서 그 이후로도 많은 날의 나는 엄마를 탓함으로써 나의 실수나 잘못이 사라질 수 있다고 믿으며 도망 다녔다.

    딸에게 시도 때도 없이 '엄마 때문이야'라는 탓을 들으며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억울했을까 아니면 정말 딸의 인생에 닥치는 크고 작은 여러 부정적 결과가 정말 자신의 탓이라도 되는 것 마냥 여기기라도 한 것일까. 내 기억에서는 순식간에 홀연히 사라진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혀 이토록 오랜 시간 엄마를 괴롭힐 걸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텐데... 때로 말은 마음보다 가볍고, 그럼에도 마음에서 쉽사리 날아가지 못하고 질기도록 오래 남는 녀석.

    결국은 다 나 때문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그 순간, 엄마가 입버릇처럼 내게 했던 무수한 푸념들이 나를 찾아왔다.

아이고... 나도 그런데 너도 새치가 많네.
점을 빼야겠다. 왜 닮아도 그런 걸 닮아서...
엄마가 부족해서 네가 좋은 짝은 못 만난 건가 싶어서...
엄마가 골다공증이래. 너는 미리미리 약도 먹고 우유도 많이 마셔.

        정작 나는 한 번도 엄마 탓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들에도 엄마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하루하루 잠식되어 버린 걸까 봐, 두려워졌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을 돌아서 엄마가 나에게 사무친 말을 찾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내뱉고 영영 놓쳐버린 그 말을 원래대로 되돌릴 순 없겠지만 다시 엄마에게 되돌려 보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제 어떻게 해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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