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파리를 걷다_(3)

사진만이 여행의 순간을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

by 현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성공적으로(?) 공항에서 오페라 역까지 어찌어찌 왔다는 기쁨에 정신줄 가출시키고 언니에게 전화를 하려는 순간, '저기요'라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소매치기가 제 백팩을 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한국인 여행자의 구원 같은 외침(?) 덕분에 가까스로 빈털터리가 될 뻔한 위기를 넘겼죠. 낯선 땅 파리에서 느낀 한국인의 정(감격)


그나저나 여행 첫 에피소드가 소매치기 위기 탈출이라니... 파리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오르세 미술관입니다. 이번 파리 여행 콘셉트는 갤러리 투어였기 때문에 미리 파리 공항에서 뮤지엄 패스를 구입했습니다.


뚜벅이들의 자유여행 시작은 교통 카드 충전에서 시작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파리산(?) 교통 카드를 만들기로 합니다. 그런데 파리는 교통카드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쉽사리 결정을 못하겠더라고요. 이것저것 고민해본 결과 우리는 화요일부터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나비고 1주일이 가장 좋을 것 같았습니다. 이 카드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 동안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기 때문에 저희처럼 월요일에 가깝게 여행을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좋습니다.


지하철역 어디서든 만들 수 있다는 말에 아침 일찍 숙소 근처 역으로 달려갔습니다. 출근 시간이랑 겹치는 탓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행지에서는 그 모습마저도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그렇게 내 안의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지는 신비한 현상을 겪으며 조용히 저희들의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우리 차례가 와서 나비고를 만들려고 왔다고 했는데 아, 직원이 상당히 불친절하더군요. 여행자들에게 그다지 친절한 도시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경험하니까 당황스럽더라고요. 무표정한 얼굴에 말투도 거칠고(?)... 물론 엄청난 친절까지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과는 너무 다른 현지인의 태도에 '우리가 뭐 잘 못했나' 싶어 주눅이 들어버리니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우리는 애써 위로했죠.

우리가 불어를 몰라서 그래
원래 좀 센 악센트를 가진 언어잖아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찾는다고 증명사진 한 장과 보증금 5유로, 충전금을 건네고 뭔가 입장이 바뀐 것 같지만 최대한 상냥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미소 지어봅니다. 고분고분하게 기다린 탓(?)인지 무사히 저의 이름으로 된 교통카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게 또 뭐라고 신기하고 좋은지. 그녀의 불친절은 금세 잊혔고, 위풍당당하게 나비고를 들고 파리 버스에 올랐습니다. 오, 교통카드를 찍는 손맛(?) 아주 좋더라고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사실 저는 그림에 문외한입니다.

살면서 미술관에 가 본 경험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에 교과서를 나름대로 성실하게 본 것을 제외하면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가 파리 여행 콘셉트는 갤러리 투어라고 했을 때 무조건 동의했던 것은 단순히 '갤러리 투어'하면 뭔가 있어 보기 이도 했고, 미술책에서나 볼 수 있던 그림을 이번이 아니면 실제로 볼 기회는 없을 것 같았거든요. 제 의지로 갈 곳은 아니니까 언니가 가는 김에 그냥 한번 가보자 했습니다. 분명 오르세 미술관을 도착하기 전에 그곳에 간 이유는 그게 다였습니다.


눈으로 보는 감동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름 정도만 들어본 적이 있었던 오르세 미술관. 그 내부에 들어서서 느끼게 되는 위용은 실로 더 대단합니다. 이토록 신기한 구조를 가진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던 내게 언니는 설명해주었습니다. 예전에 기차역으로 사용하던 곳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라고요. 이름이 오르세 미술관이 된 것도 역의 이름 '오르세'에서 따온 거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대단해 보입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도 그만이었던 공간을 미술관으로 바꿀 생각은 누가 한 것일까요? 그래서인지,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차를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림들 하나하나가 진짜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장소가 되어, 하나의 사람이 되어, 하나의 풍경이 되어...


또 한편으로는 고흐, 마네, 모네, 르누아르, 밀레, 앵그르 등 미술책에서나 보았던 이름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가 이렇게 많은 화가를 알고 있었나?' 하는 우쭐함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한국어 가이드를 들으며 그림을 최대한 음미하면서, 아주 천천히 전시관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한 그림 앞에서 저는 아주 한참 동안이나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작품명 모네의 [루앙 성당. 성당의 정문과 생 로맹 탑, 아침, 흰색 조화]

모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작품은 교과서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오디오 가이드 설명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저 그림 앞에서 섰을 때 핀 조명처럼 빛을 받으며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오직 저 그림과 저, 둘만 세상에 남겨진 것 같았던 그 순간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그때 모네의 팬이 되었습니다. 그림이 화가의 세계관 표현일 뿐 아니라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화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미스터리한 순간의 강렬함이 그를 동경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돌이켜 보면 그동안의 여행은 웃프게도 즐기기보다는 보여주기에 더 가까웠습니다. 인증샷 찍는 데 급급해서 가야 되는 곳도 많았고, 해야 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 여행에서 시간 가성비 떨어지는 미술관은 사치죠. 아이러니하게도 쉬러 간 여행에서 가장 바빴던 건 매번 내 마음이었습니다. 정작 마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죠. 여행이 꼭 그래야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미슬관을 가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파리 여행이 저를 바꿔놓은 것이죠. 여행지에서 알게 된 화가나 건축물, 역사가 더 알고 싶어 졌고 여행에서 돌아와 관련 책을 읽는 전에 없던 습관도 생겼습니다. 물론 여행 전에 읽는 것도 좋지만 저는 다녀온 후 읽는 게 더 마음에 남더라고요.


사진만이 여행의 순간을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이미 이 여행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여행 첫날 일뿐인데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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