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파리를 걷다_(5)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도시에서 에펠탑의 시간은 매일 흐른다

by 현진
몇 번이고 다시 가야만 했던 이유

파리에 오면서 제가 상상했던 여행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에펠탑을 보고, 매일 밤 와인과 함께 잠을 청하는 것.

하지만 현실은 여행 셋째 날 아침이 되도록 에펠탑 근처는 가지도 못했고, 와인향은커녕 구경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여유롭게 다닌다고 다녔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맥모닝으로 시작한 아침 그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아마도 갤러리 투어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요하는 여행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그림 무식자의 헛된 망상 같은 계획으로는 한두 시간이면 넉넉하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작품 수도 너무 많고, 한 번 보기 시작하니까 되도록 많은 작품을 보고 싶은 욕심이 끝이 없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상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아무리 갤러리 투어를 할 생각으로 왔다지만 파리에 와서 그림만 보고 갈 수는 없는 일. 일찍 일어나는 여행자가 하나라도 더 본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좀 더 빡빡하게 써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맥모닝 그릇을 반납하려던 그때! 발을 헛디뎌 오른쪽 발목이 90도로 꺾이는 대참사가! 맙소사! 그 순간 예감했습니다.

아, 이거 심상치 않겠다.
이제 겨우 여행 둘째 날 아침일 뿐인데...
나에게 이런 불운이...


진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이거 발목이 부러졌나?' '걸을 수는 있을까?' '병원으로 가야 하나?' 아무리 저질체력이었어도 여행에서, 심지어 한국에서도 다친 적이 없었는데..


생전 처음 가게 될 응급실이 파리라니. '진짜 심하게 다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과 같이 온 친구까지 저로 인해 여행을 할 수 없게 될까 봐 진짜 아찔했어요. 다행히 너무나 생동감(?) 있게 넘어진 탓에 깜짝 놀란 직원이 얼음 봉지를 줘서 한 15분 정도 얼음찜질을 하고 나니 괜찮더라고요. 제가 하이탑 운동화를 신었었는데, 그게 발목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기에 망정이지 멋 부린다고 구두를 신었다면 아마 상상은 현실이 됐을 겁니다.


발목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파리에 와서 꼭 보고 싶었던 것을 봐야만 했거든요. 저기 멀리 그렇게 고대하던 에펠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단어만으로도 나를 수없이 설레게 했던 에펠탑

실제로 보니 크기가 너무 커서 그 위용에 압도당했어요. 뭔가 소개팅에 꽃미소 날려주는 훈남을 상상하고 나갔다가 상남자를 만나 당황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마음의 준비 없이 민낯 여친을 만난 느낌 하고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계절 탓도 있었을 거예요. 에펠탑이 거칠어 보이고, 쓸쓸하고, 고독해 보인 이유는.


아무튼 겨울 모닝 에펠탑은 사실 로맨틱하다거나 달콤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거기다 에펠탑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같이 하기 어려운 존재였어요. 크기가 너무 커서 사진 한번 찍으려면 어찌나 멀리 달아나야 그 각(?)이 나오는지... 멀어질수록 자신을 다 보여주는 에펠탑인 걸 알면서도 저는 또 포기 못하고 질척 질척. 근데 이건 에펠탑에게도 문제가 있어요. 당연히 저랑 밀당하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갈 때마다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지. 거기에 빠져서 그다음 날에도 가고, 낮에도 가고, 밤에도 가고, 비가 와도 가고...


그 입장(?) 되어 보니 알겠더라고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파리 여행에서 에펠탑에 집착(?) 하는지. 고작 며칠, 몇 번 밖에 못 본 에펠탑이었지만 하늘의 빛에 따라서,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서, 밤의 기운에 따라서, 그 계절에 따라서 그 모습이 같을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가야만 했고, 가능한 한 많은 시간 눈에 담고 싶었습니다.

찬란하게 빛났던 역사의 시간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파리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도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에펠탑은 달랐어요. 우리의 시간과 에펠탑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다고 느꼈죠. 마치 매일 다른 옷을 입고 '어때 오늘도 나 좀 멋지지?'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왠지 그 질문에 꼭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았던 시간들. '너 오늘은 어제와 또 다르게 아름답구나!' 저는 에펠탑을 마주할 때마다 말해주었습니다. 파리에한결같지 않음에도 실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분명 에펠탑일 겁니다.


1월이 아닌 다른 달, 다른 계절의 에펠탑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매일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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