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나는 제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한다. 꼭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상대에게 메뉴얼을 다 건네지는 않는데, 나는 왜 제제에 대해서는 유독 그랬을까, 최근에 그것에 대해 크게 돌아보게 된 사건이 있었다.
3학년이 되면서, 제제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2주에 한 권 지정도서를 읽고 독서기록장을 써가는 숙제를 시작했다. 책은 학교에서 제공됐고, 3학년 여덟 개 반이, 정해진 순번에 따라 돌려 읽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제반에 온, 첫 번째 책이 하필 ‘복제인간’에 대한 소설책이었다. 180 페이지에 육박했고, 그림은 거의 없고, 글씨가 아주 빡빡하게 박혀있었다. 실은 나도 보자마자,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개취이니 양해바랍니다.) 호감인 책은 아니었다.
제제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국어 성적이나 글쓰기는 일반 아동들과 비교해도 곧잘하는 편이라, (필체만 빼면,) 3학년이 되어도 읽고 쓰기에 관한한 위화감이 덜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독서광인 친구들에 비하면, 많이 뒤쳐질 지는 몰라도, 처음 접하는 분야도 몇 번 곱씹어 읽고 나면, 결국 애정하게 되어, 읽은 책을 인형처럼 껴안고 다니곤 하는 제제였다. 그런데, 첫 윤독독서였던 그 책은 어느 금요일 오후 우리집에 예고없이 도착하여, 월요일에 독후감을 써가야하는 형편으로 찾아와 다소 당혹스러웠다.
금요일 저녁 외출했다가 집에 오니, 제제는 페이지를 반복해 읽어도, 재미도 없고, 이해가 어려워, 겨우 다섯 페이지밖에 못 읽었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제제와 같은 반의 어머니 회장을 했고, 올해도 우리반 어머니 회장을 맡고 있는 유준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왠만한 친분이 아니고서는, 전화를 불쑥하는 편이 아닌데, 그날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2년째 제제와 나를 알아왔으니, 제제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있다고 내가 은연중에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오다가다 만나면, 반갑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주었고, 그녀의 아들 유준이도 제제와 2학년 때 여러번 짝이나 같은 그룹이 되어도, 제제를 잘 도와주는 듬직한 아이였다. 방학 때에도, 길에서 마주치면, 먼저 제제는 무슨 학원을 다니는지 같은 질문도 건네는 다정하고 인상좋은 아이였다. 그녀는 3학년 반이 발표됐던 날, 본인이 아는 선에서 3학년 1반부터 8반까지 누가 어느 반인지 엑셀로 정리해서, 2학년 엄마들의 단톡방에 올려준 사람이었고, 3학년 현재 반의 단톡방을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이었다. 귀찮은 회장직을 두 번씩이나 맡아서 하다니, 털털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그러니까, 나나 제제에 대해 큰 설명이 필요없는 사이라 생각했기에, 쉽게 통화 버튼을 눌렀나 보다. 그저 윤독독서가 이렇게 갑자기 주말 폭탄처럼 늘 도착하는 것인지 의아해서, 물어보려 한 것이었다. 사실 ‘복제인간’이라는 상상속에서 존재하는 개념은 제제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페이지가 수월하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주말의 갑작스런 스트레스로 다가오긴 했다. 근데 그게 화근이었다.
“숙제 책이요? 못 봤는데, 지금 한번 볼게요. 음...이 정도면, 3학년이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휘리릭 다 읽어버릴 만한 책인데. 제제는 못 읽어요? 보통 이 정도는 일도 아니게 읽는데!”
“아 그렇군요. 주말에 그래도 가정에 따라서는 특별한 이벤트나 여행 일정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학원 숙제들도 있을 수 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 책을 미리 공지했었던 것인지, 학급에서 1~2주 정도 텀을 두고 읽어왔던 책인지 궁금해서 전화드려 봤어요. 제제는 물어봐도 말을 잘 안 해줘서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자유독서가 아님에도) 이틀만에 지정해준 책을 다 읽어야 하는 상황인지도 궁금했구요. 작년 2학년 담임선생님은, 제제에게 조금 부담스러울 만한 과제는 미리 언질을 주셨는데, 3학년 첫 독서 숙제치고는 분량이 많아서 저도 좀 놀라서요.”
“담임이 그런 것까지 해줘야 해요? 제제는 지금도 다른 애들하고는 다르게 특혜를 많이 받는 것 같던데? 다른 아이들은 혼나는 일도, 제제만 혼나지 않는다고, 유준이가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까 담임선생님이 지금도 충분히 제제를 챙기시는 것 같던데요! 제제가 힘들면, 제제 어머님이 읽고 대충 숙제 제출하세요. 많으 바쁘신가 봐요? 안 해오는 애들도 많을 텐데 대충해서 보내세요.”
“아, 네네 그렇군요. 이제 윤독독서 하는 걸 알게 됐으니, 집에서 미리 시간을 두고 읽어보게 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담임선생님 탓을 하는 건 아니고, 저희 아이가 시간이 더 걸리는 부분이 있는 것이니, 제 선에서 잘 챙기면 될 것 같아요. 도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제제 학교생활의 필요한 전반을 자주 알려주셨었다. 그리고 그녀는 선생님을 떠나 3학년이 되는 제제에게, 두 명의 수호천사를 고르고 골라, 우리 제제와 함께 같은 반으로 올려주셨음을 나는 안다. 그런 아이 중에 유준이가 있었던 것이므로, 나는 유준이 엄마의 말에 더욱 마음이 어려워졌던 것 같다. 제제를 잘 아는 유준이 엄마도 저렇게 불편한 마음이라면, 다른 엄마들은 제제와 나에 대해 더욱 불편한 마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금방 이르렀다.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면에는 여러 생각으로 복잡함이 밀려왔다. 그러다보니, 나는 그 말들에 긁혀 허우적대다, 주말내내 소화불량에 열까지 나게 되는 몸살을 앓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곰국을 끓이듯, 나 자신에게 편한 쪽으로 결론을 내고 있었다. 실은 그녀가 (MBTI 성격검사에서) 비교적 대문자 T의 성향처럼 말해서가 아니라, 제제에 관한한 내가 대단한 말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말을 무심하게 넘기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돌아보면서 말이다.
나와 타인은 다르다. 아무리 남의 신발을 신어 본다한들, 우리는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처럼 다름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남편이 똑같이 제제를 염려하고 사랑하지만, 우리가 전혀 다른 사람인 것과 같이, 그녀와 나도 분명 다르다. 사실 그날 대화의 요는 “대충 해가요!” 였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제제만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만이 그녀의 중심 생각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람이란, 본래 본능적으로 자기 보호를 위해 자기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지만, ‘나=내가 속한 공동체’라는 의식에서 완전히 떼어질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녀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만 하는 편협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저 내가 작년에 비해 표현이나 전달이 적어진 담임선생님으로 인해 제제를 너무 걱정 할까봐, 도리어, 선생님께서 이미 제제를 잘 챙기고 계심을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고.
이후에, 담임선생님과의 면담 때, 나는 이와 관련해 선생님께 애둘러 여쭈었다.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이 제제에 대해 설명을 요구할 때가 있는지,‘제제의 다름’에 대해 어느 정도 친구들이나 학부모들이 인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담임선생님은 면담기간 동안, 제제에게만 친절한 담임선생님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학부모가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던 그림을 우리 부부에게도 보여주었다. 꼭 제제라고 특정하지는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이 이 그림을 보며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 그릇이 커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여주셨다고 하셨다. 감사한 마음에, 나는 도리어 “제제는 좀 엄격하게 말씀하셔야, 말을 잘 듣는 경향이 있어요! 잘 못하면, 혼도 세게 내주세요 선생님!” 이라고 했고, 선생님은 연간 윤독독서 리스트와 다음 독서과제인 책을 먼저 건네시며, 제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 주셨다.
“선생님, 혹시 제제 엄마세요? 왜 제제한테만 더 친절하세요?”
“돌아가며, 책 읽기를 할 때, 저희는 어디 읽는지 못 따라오면, 집중 안했다고 혼내시면서, 제제한테만 왜 선생님이 직접 가서 어딘지 가르쳐 주시는 거에요?”
때때로 담임 선생님은, 이러한 아이들의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히셨을 것이다. 학기 초에는 비교적 그 빈도가 잦았는데, 이제는 반 친구들이 다 제제를 말없이 도와준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교사가 말해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제제를 돕는 데서 행복을 자꾸만 얻어간다고 말씀해 주셨다.
입장바꿔, 생각해 보면, 아이가 집에 와서 투덜투덜 서운한 기색을 하면, 여느 학부모나 아이 마음과 같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혹은 제제가 사실 거의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자폐스펙트럼의 끝자락에 있어서, 나와 제제의 처지를 잘 모르지 않을까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부터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아서, 혹은 일반 아이들 틈에서, 제제가 비슷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제를 특수학교가 아닌, 공립 초등학교로 보낸 것인데, 이제 부족한 제제를 받아들여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갖거나, 선생님이나 친구들 덕을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조금은 나와야, 제제도 더 성장하지 않나, 이 일을 통해 생각하게 됐다. 적어도 여기저기서 기대한 마음이 어긋났을 때, 서운한 마음을 갖지 않는 태도는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단단히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제제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욕심을 내왔던 것에 대해서도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사실 제제는 욕심을 안 내기엔 아깝고, 욕심을 내기에는 버거운, 상황이긴 하다.) 물론, 아이에게 약속이나 규칙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은 가르쳐야 하겠지만, 제제가 읽기에 버거운 책을 꾸역꾸역 내가 제제인냥, 완벽하게 꼭꼭 씹어 읽고, 제제 입에 소화하기 좋게 넣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더 크면, 그건 더 어려워질 것이고.
사실, 유준이 엄마 말은 일정 부분 맞았다. 기간 안에 못한 거면, 못한대로의 제제 그대로로 키워내는 것, 그렇게 해야 나 자신도 부담이 없거니와, 제제도 부대끼지 않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나 유준이 엄마에게 잠시나마 서운했던 마음도, 제제의 전달력에 부족함이 있었던 것을 (없는 것처럼) 덮고 싶은 마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남보기에 가지런한 결과물을 내고 싶은 내 과욕이었음을 솔직하게 알아차린 시간이었다. 그런데, 엄마 마음이라는 게, 알지만 칼로 무 자르듯 현실에서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결국, 복제인간 소설은 열병을 앓아가며, 내가 절반 이상 읽다가, 주인공에게 편지쓰기를 엄마인 내가, 타이핑 해서, 제제가 그것을 보고 열심히 써갔다. 내용이 길어서, 쓰다가 팔이 아파서, 결국 어미인 내가 뒤에 서너줄을 써주었다. 남편은 ChatGPT에게 해당 책의 줄거리를 물었지만, 온당한 답을 얻지 못해, 30페이지 가량을 읽다가, 인상 깊었던 한 부분에서 편지쓰기를 해도 충분하다며, 제제에게 편지글을 불러주려 했지만, 나의 과욕으로 그 주말은 제제도 나도, 남편도 다같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야 말았다.
사실 제제는 윤독독서 책이 학급문고에 비치돼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꽤 긴 기간 동안, 쉬는 시간마다 읽으며, 독후감 쓰는 날, 가벼운 마음으로 해치웠지만, 제제는 한 두 장 읽어본 뒤에, 책이 두껍고 글씨도 빼곡하고, 그림도 없고, 자기 취향도 아닌 책이라, 못 들은척 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세 번째, 네 번째 책은 그림이 가득하고, 아주 얇고 예쁜 동화책이었어서 제제 힘으로 무난히 잘 제출했다.
그러고보니, 이 모든 것이, 제제가 아닌 엄마의 편협함을 깨며, 엄마를 성장시키는 과정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그 다음 윤독독서로 선정된 책을 집으로 주문했다. 우리는 누구나, 능력 이상의 일들을 삶에서 만난다. 그건 어른들에게나, 수수에게나 다 마찬가지다. 그럼,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살아내면 되는 것임을 알았으니, 제제에게도 똑같이 일러주면 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은 그래서, 앞으로는 사서 고생하지말라는 메시지로 우리에게 선물로 온 것일 테다.
어제 하교시간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제제도 나도 우산이 없는데 어떡하지. 나는 학교 앞으로 비를 맞으며, 뛰었다. 같은 반 친구 서유는 제제에게 우산을 씌워 내 앞에 나타났다. 스승의날, 2학년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이벤트를 할 때에도, 같은 반이었던 지유가 제제를 데리고, 작년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제제는 시키지 않아도, 정말 사랑스러운 편지를 한바닥 써서 선생님 얼굴에 웃음이 만개하게 했다고 한다.
제제는 편지봉투에 크게 썼다. ‘멜빵바지가 잘 어울리는 000 선생님께.’ 멜빵바지는 아무나 어울리는 바지가 아니다. 날씬하고 키가 크고, 얼굴이 작고 사랑스러운 여성이 어울림은 물론이고, 어른 아무나가 소화해 내기에 가벼운 착장이 아니다. 그 옷을 골라 입으신 선생님을 알아봐준 제제가 선생님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나만 그런게 아니라, 000 선생님 또한 그렇게 느낄 것이다. 신경써서 옷을 잘 차려입는 사람에게, 그런 관찰과 알아차려줌은 큰 선물일 것이다.
제제가 어려운 공부는 온전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채 넘어가도 좋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편지를 쓰는 사람이라면, 충분하다 제제야. 우산을 나눠써주는 친구가 있고, 그리운 선생님을 만나러 같이 갈 친구가 있는 너는 정말 행복한 열 살이다 제제야. 어제는 그런 마음으로 충만한 날이었다. 이렇게, 계속 나나 아이들 모두, 너무 애쓰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을 하루하루 웃으며 살아내면 좋겠다. 그런 일은 누구보다 잘할 필요도 없으며, 누구를 의식할 필요도 없는, 그저 행복한 일이므로. 그것 자체로 충분한 행복이다.
애초에 ‘나’라는 인간에 대해 애걸복걸 이해를 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로써 나는 이제 제제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버릇을 완전히 버리는 엄마가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