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시작
재작년 겨울, 나는 난생 처음 사주를 봤다.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엄마 아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출생 시간을 돌려돌려 물어본 뒤, 럭키 아파트 앞 어느 카페에서 커피 대신 물만 마신다는 사주 아저씨를 만났다. 인생의 변곡점에 서있다는 느낌이 가득했던 그때, 나는 앞에 놓인 미래를 조금이라도 엿보고 싶었다.
내가 말해준 것도 없는데 아저씨는 나의 출생일자와 시간만 가지고 나의 직업과 과거 연애사부터 시작해 나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하나씩 다 꿰뚫어보고 이야기해주셨다. 안 그래도 귀가 얇은데 구남친의 성격까지 맞추고 나니까 아저씨의 말에 완전히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만난지 삼십 분만에 아저씨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겐 차마 말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품어왔던 나의 꿈이 과연 실현가능한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 당장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꼭 책을 내고 싶은데, 제가 잘 될 수 있을까요?’
아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에게 화(火)기운(예체능 관련 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런 쪽은 다음 생에나 꿈꿔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 해주셨다. 끙. 그럼에도 내가 아쉬워하고 미련을 보이자 아저씨는 나를 완전히 단념시키고 싶으셨던 건지 친절하게 내 책의 독자는 나 한 명뿐일 거라고 덧붙여주셨다. 나름 글쓰기에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던 차였는데 이게 뭐람.
생각해보면 나는 어렸을 때 글 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에는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글쓰기 강좌를 엄마가 억지로 등록해서 몇 번 갔었는데, 친구들의 생일 파티랑도 겹치고 원고지를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갑갑해져서 그 후론 거의 안 갔다. 그 시간에 나는 중앙공원 벤치에 혼자 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나중엔 엄마한테 걸려서 억지로 또 몇번 가게 되었지만 끝내 원고지에 정을 붙이진 못했었다. 나에게 글을 잘 쓰고 좋아하는 친구들은 그냥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어떻게 글쓰기를 싫어하던 나는 국어교육을 전공하게 되었고, 미뤄두었던 작문교육론 수업을 막학기가 되어서야 듣게 되었다. 교수님이 첫날 내주셨던 과제는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유롭게 써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글쓰기에 크게 두각을 드러낸 적도 없었고 해서 나는 글쓰기가 어렵고, 정해진 시간 안에 글을 쓰는 게 특히 부담스럽다고 솔직하게 써서 냈다. 이렇게 써낸 글에 대해 나중에 따로 피드백을 받지는 않았지만, 교수님은 내가 중간고사에서 글을 쓸 때 종이 치고 나서도 한참을 더 기다려주셨다. 나를 말없이 기다려주신 이 교수님 덕분에 나는 마음을 놓고 글을 썼고, 글쓰기 관련 수업에서 처음으로 A+를 받아 보았다. 이때 글쓰기에 대한 마음의 벽이 살짝 허물어졌다.
그리고 대학원에 다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내가 학부때부터 너무 존경하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 교수님은 여는 수업마다 매주 한 편씩 글을 써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 글에 대해 아주 좋은 피드백을 해주셨다. 내 글에서 부족한 부분은 구체적으로 짚어주셨고, 좋은 점에 대해서도 초등학교 선생님들처럼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다섯 학기 동안 이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글쓰기에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가지고 사주 아저씨한테 물어봤던 것이다. 그런데 글로는 안 될 거라니. 사주를 보고난 뒤로 앞으로 글을 쓰지 말아야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선 엄청 웃으며 말했다.
‘야 네가 쓰고 싶으면 쓰고 안 쓰고 싶으면 안 쓰는 거지. 사주가 다 맞는 것도 아닌데. 그냥 써. 너 책 내면 내가 사줄게.’
다행히 귀가 얇은 나는 친구들의 말에 다시 용기를 얻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속 글을 써보기로 했다. 나는 무슨 엄청난 사명감이나 성공 욕구를 가지고 글을 쓰려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그저 글쓰기를 통해 잊고 싶지 않은 나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글을 통해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점검받고 싶다. 사주 아저씨의 말이 맞다면 내가 책을 통해 부귀를 누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는데 내 운명이 펜을 부러트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소소하지만 건강하게 글을 통해 내 마음 속에 쌓인 이야기도 풀어내고, 또 글을 통해 생각을 다듬을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내 스스로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글을 쓰면 독자가 적어도 괜찮지 않을까? 계속 글을 쓰다보면, 나랑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런 마음을 안고 나는 올초부터 블로그에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난 주에 처음으로 브런치에 글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앞으로 브런치에 남기는 나의 작은 글들이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