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의 집에 자주 간다. 직업의 특성상 다양한 집에 참 많이도 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집주인은 자신의 집을 최고의 상태로 정리한 채 나를 기다린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나는 이 직업이 배울 것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곧 그만 둘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몇번의 고비가 있었다. 하지만 중간 중간 나를 설레게 하는 마약같은 것이 나를 이 곳에 머물게 했다. 이 일은 무척 흥미로운 일임이 분명하다. 아주 허름한 집부터 아주 웅장한 집까지. 모든 집들이 나에게 잘보이려고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을 보는 일. 집 짓는 사람을 꿈꾸던 나는 이제 집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집을 바라보게 되었다.
집이란 것은 짓기가 참 애매하다. 건축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 서술은 하지 않겠다. 예상 가능하겠지만 보통 그 보다 더 복잡하다. 생겨날 집이 아닌 버려질 집을 보는 것은 내게 참 쉬운 일이었다. 창조가 필요없는 일이라니, 유능한 기술인이 되기보다는 더디더라도 깊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고싶었는데. 충분한 고민 후에 내린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업에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대부분 일이 그렇듯, 사전에 우려하던 것과 실제 겪게되는 고민은 그 방향이 달랐다.
버려질 집을 바라보는 것. 하루에 네, 다섯개의 집을 보고 있으면 집을 지어야 할 때 만큼이나 아주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든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잘, 혹은 잘못 다듬어진 집들을 보는 일은 어느 순간 집 주인을 관찰하는 일과 경계가 모호해진다. 나는 건물을 보는데 자꾸 보면 안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소하게는 그 사람이 쓰는 향수, 읽는 책, 신는 구두, 물건을 정리하는 순서 등 부터 나아가 집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버리다싶이 하는 물건은 어떤 것인지,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결혼은 누구와 했는지, 심지어는 결혼하던 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까지 알게 된다. 이웃이 어떤 사람들이고 얼마짜리 집에 살고 수입이 어느정도인지는 이제 주소만 들어도 그려진다. 더러 그 사람이 건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게된다. 이제 건축가가 누구고 어떤 마감 디테일을 썼나 생각하던 예전 습관은 너무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집의 주인공은 사는 사람이다.
유쾌한 사람의 집은 유쾌하고 진지한 사람의 집은 무겁다. 무심해보이지만 집 안 가득찬 장난끼와 동심이 주인의 본모습을 일러주기도 하고, 정성스레 꾸며놓은 집 구석은 주인의 떨리는 마음을 대신 설명해주기도 한다. 말보다 행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행동의 집약체인 집을 본다는 것은 정말 그 사람을 꿰뚫어보는 느낌까지 준다. 집이 아니라 사람을 관찰하자면, 내가 그들과 함께 겪는 순간은 그들이 집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순간이다. 대충 해놓고 살았기 때문에 대충 얻어걸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부터, 집이 너무 소중해 나를 만나는 게 너무 슬프고 버거운 이들까지. 집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표정, 벽을 만지는 손결을 보면 이 집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여러 집들 중, 오늘 참 부러운 집에 다녀와서 그 집을 소개할까 한다. 사실 이 집에 다녀온 후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34923u48593058 (삭제했습니다). 주소도 잊히지 않는다. 수 많은 멋진 집들을 봐왔지만 정말 탐나는 삶을 가진 집이었다. 가족 구성원은 둘. 키가 아주 큰 젊은 남자와 덩치가 크지만 어린 검은 개 한 마리였다. 주변보다 작은 건물의 LOFT로 복층 집이었다. 나무로 마감된 따뜻한 느낌의 이 집은 정말 '훌륭'했다.
우선 나의 이목을 끈 건 개였다. 나는 개를 네 마리 키운다. 이 일을 하며 가장 곤혹스러울 때가 집에 강아지가 있을 때이다. 일을 해야하는데 개와 놀고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건 애견인이라면 단번에 이해할 고충이다. 이 집에 살고있던 개는 덩치가 컸지만 얼굴과 발목, 걸음걸이가 영락없는 아가였다. 윤기가 흐르는 털과 깨끗한 눈, 촉촉한 코.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한 강아지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사는 집은 어떤 곳일까 ~ 내 신발을 물고 나를 졸졸 따라오는 강아지는 애교스러웠고 장난기 있었지만 어딘지 침착하고 혼자있는 법을 아는 것 같았다.
집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묵은 살림 하나 없이, 갈 곳 잃은 짐 한 짝 없이, 제자리에 잘 자리잡은 물건들이 집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해줬다. 온도, 습도기가 갖춰진 옷장에 옷들은 잘 걸려있었고 가구들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것들로 적절히 모여있었다. 젊은 청년이 그간 하나 둘 사모았을 소품들은 다양하고 동시에 일관됐다. 자신의 취향을 잘 아는 사람이 오랜 기간 다양하게 모아온 것들이었다. 강아지 모양의 나무조각, 귀엽고 편안한 의자, 색감이 좋은 램프와 간단하게 생겼지만 견고한 테이블. 무심한 듯 하지만 결코 무심하지 않고, 지나치게 깐깐하지도 않은 삶이었다. 혼자 그 큰 집에 살면서 이렇게 섬세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부러운 습관이었다. 화장실 바닥은 잘 말라있었고 문에는 샤워 가운이 걸려있었다. 샤워 부스, 바닥 타일, 세면대, 변기. 모두 조금씩 특이한 것들이었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 있었지만 수집이었다. 자신의 취향을 잘 아는 사람의 집 안에서 나는 잠시 할 일을 잊고 집을 감상했다.
거실을 빙 둘러싼 높은 진열장 한 켠에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 모자와 와인이 가득한 와인 셀러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부내와 덕내가 부지런함에 버무려져 나란히 놓여있었다. 경이로웠다. 진열장 아래로는 빌트인 서랍장이 있었는데 손잡이가 없어서 언뜻보면 벽같은, 비밀스러운 수납공간이었다. 캐비넷을 하나씩 열어볼 때의 두근거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점점 흥분이 고조되던게 아직도 생생하다. 캐비넷이 다 끝나 서운하려하던 순간 벽 끝자락에 있던 분수 강아지 물그릇이 디저트처럼 놓여있였다. 은색 밥그릇에서 거꾸로 물줄기가 쫄쫄쫄 나오고 나의 쾌감도 쫄쫄쫄 뿜어져 나왔다.
나는 내 직함을 200% 활용하여 온 집안 구석구석을 소개받았다. 빌트인 서랍장 뒷쪽으로는 숨겨진 창고가 있었다. 계단 위에도 계단 아래에도, 주방 선반 아래에도, 옷장 뒤에도 숨겨진 공간들이 계속 나왔다. 주인은 본인이 알고있는게 다가 아닐 수 있다며 너스레 웃어보였다. 아파트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숨은 공간이 있을 수 있나 싶을정도로 많은 공간이 끊임없이 나왔다. 이 집이 매물로 나왔을테니.. 내가 살까.. 하는 생각에 잠길 무렵 마지막 가장 비밀스러운 안쪽에 있는 창고 문에 맞닥뜨렸다. 주인이 이것이 마지막 창고라며 문을 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 물감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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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터 옆 서랍에 노트북 여덟 대를 넣어놓고, 벽 한 켠에는 천장 끝까지 우퍼를 가득채워 놓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창고에는 페인트 물감이 들어있었다. 제법 쓰인 것도 있고 깨끗하게 닦여있는 것들도 있었다. 이게 왜 여기있냐고 물을 생각도 못하고 그 순간이 지나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고 너무 가볍게 지나가버린 장면이라 가장 생생하게 떠오른다. 넣어놓고 잊어버린 쓰레기였을까? 은연중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 넣어놨을 물건. 나라면 어떤 물건을 넣어놨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이 집을 떠나야하는 손님이라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채운 그 집은 집 주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월세집에 산다는 이유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집과 나를 따로 떨어뜨려 생각해온 나에게 그 집은 삶을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집과 주인은 서로 닮는다. 불편했던 불변의 진리를 꽤나 긍정적인 방법으로 배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