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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현주 May 27. 2018

듣기, 가장 원초적인 임파워먼트

첫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상사 중 한 분은 “아이 히어 유”(I hear you)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내가 반론을 제기할 때, 불만을 표시할 때, 의견을 내놓을 때, 그분은 동의나 반대, 이해나 의문을 표시하기 전에 늘 “아이 히어 유”라고 말했다. 우리말로 옮긴다면 “네 말을 들었어” 정도일까. 너의 말을 그냥 ‘소리’로서가 아니라 ‘메시지’로서 내가 들었어. 이 말에는 나의 토로에 묻어 있던 감정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었다. 나지막하게 건네지던 이 말에 내 목소리도 함께 낮아졌다. 그 순간 내가 뱉은 의견이 더 이상 나의 것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말이 관철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 같지 않게 느껴지는, 그런 마법의 말 같았다. 그녀는 내 말을 들었고, 그 말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그래서 내 말은 이제 우리의 말이며, 내 말이 나오도록 이끈 문제를 그녀와 내가 함께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임파워먼트’(empowerment)는 경영학의 조직관리 분야에서나 사회복지학, 정치학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다. 그 대상이 스스로 능력과 권한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게, 그 믿음에 따라 능력과 권한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일컫는다. 이 단어를 풀어쓰자면 “힘(power)이 있도록 해주기, 힘이 있는 상태에 놓이도록 해주기” 정도일 것이다. ‘권한 부여’라고 흔히 옮겨지곤 하지만, 제도적 권한을 넘겨주는 것보다는 훨씬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 막 3년 차에 접어들었던 내가 “아이 히어 유”라는 말에서 느꼈던 것이 바로 임파워먼트의 감각이었다.


2015년 출간된 <사람, 장소, 환대>에서 저자 김현경은 사람과 인간을 구분하며 “인간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지만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인간을 사람이게 하는 것이 첫번째의, 가장 본질적인 임파워먼트일 것이다. 힘은 단순히 개인적 역량이 아니라 사회라는 지평에서 발휘될 수 있는 동력이다. 자신이 힘을 가진 존재임을, 혹은 힘을 가질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려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장(場)이 내 앞에 놓여 있으며, 자신의 말이 그곳에서 힘을 발휘한다는 암묵적 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어쩌면 많은 대화에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인정일지도 모른다.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하기 전에 일단 내 말을 상대가 듣고 있다는 확인. 그 확인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한 말을 거듭하고, 거듭할 때마다 목소리만 높아지는 것 같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은 말, “나는 네 말을 들었어” 이렇게 소리 내어 말하는 일이야말로 서로를 성원으로 인정하는, 서로에게 힘을 부여하는 대화의 기술은 아닐까.


*이 글은 2017년 11월 <한겨레> 신문에 실렸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18179.html#csidx662b0cb8c2d7077a7082965cb9e91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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