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욕실과 다짐
영국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느꼈던 건 집에 있는 것들이 더는 나와 에너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6주의 여행동안 어쩔 때는 친구가 갑자기 감기에 걸려서 티셔츠 두 개와 스웨터 하나로 추운 가을 날씨를 겨울 옷도 없이 버텼고 캐리어에 가득 채워 간 물건 중 6주 내내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들이 있었고 돌아올 때 물건이 두 배로 불어서 오게 되면서 살면서 물건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우리 집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중 대부분은 필요 없는 물건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집을 완전히 치우고 내가 기쁘게 지낼 수 있는, 나에게 힘을 주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열흘정도 심한 시차 적응기간을 보내면서 1년 8개월 동안 미뤘던 책장을 구매하고 모든 책과 서류, 노트, 필기도구 등 옷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내 물건을 한 방에 모았다. 나에게는 사는 데 있어서 필기도구와 책만 중요하다는 걸 봤다. 누군가는 옷, 누군가는 식기구, 누군가는 쿠션일 것이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이미 저녁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가장 만만한 욕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다람쥐가 한 달 훈련에서 돌아오면서 훈련 기간 동안 사용했던 물건들이 욕실에 왕창 있었고 그것들을 함께 지금 쓰는 것들, 사용하지 않는 것들로 분리하다 보니, 욕실 세면대에는 지금 당장 쓰고 있는 물건만 있다. 욕실을 들어가면 물건들에 압도당하던 기분이 지금은 맑고 상쾌함으로 경험된다.
선물로 헤어 제품들은 평소에 사용하지 않지만… 버리지 못했다. 언젠가 사용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사실 이 마음을 기준으로 잡으면 버려야 한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버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오늘 욕실의 경우는 주로 사용하지 않는 잉여 물건을 욕실 수납장에 눈에 잘 보이게 정리했고 그 자체로도 충분하게 느껴졌다.
다시 들어가 보니 이사 왔을 때부터 있던 뚫어뻥이 먼지에 가득 뒤덮인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고, 언젠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럼 그때 가서 새 상품을 사겠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버렸다. 그러고 나니 곳곳에 버릴 것이 보였다.
내일 가장 고난도가 예상되는 곳은 서재이다. 4년 전부터 버리는 것이 쉬워졌지만, 아직
책/종이/서류/필기도구, 그중에서도 서류/종이/내 생각을 적은 공책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내일 5시간을 서재를 치우는 것에 시간을 할애했다.
책장을 구입하고 난 뒤, 서재 그 자체로는 깨끗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씩 따지고 보면 종이, 공책, 서류, 필기구를 한 곳에 모아놓고 보이지 않게 했을 뿐이지, 분류하고 정리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과감히 버릴 필요가 있다. 언젠가 필요할 거라는 집착을 버리고, 과거의 내가 적어 놓은 것이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연민을 버리고 내일은 그냥 중요한 것들을 남기는 방향으로 접근할 것이다.
올해 사용했는가?
정말 사용하는가?
기억만을 위한 기억이라면 그냥 놓아주자.
존재만으로 미소 짓게 한다면 가지고 있자.
매일 사용할 수 있게 버리고 정리하자.
일단 내일의 시간 계획은 다음과 같다.
830~1230 �서재
종이 문서 1.5
공책 2시간
책 0.5
1230~1330 점심 휴식시간
1330~1430 �서재
미술 및 아트 용품 / 필기도구 1
영수증
1500~1630 �옷방 1.5hr
옷 / 가방
이부자리
수납장 / 양말통
(다람쥐의 캠핑용품)
1700~1900 �부엌
아랫 선반
윗 선반 1 음식/차
식기구/ 보관용기
(캠핑용품)
건강보조식품
싱크대
싱크대 옆
냉장고
저녁?
일지 쓰기/브런치 올리기
저녁 8~ 명상
인간이 하루에 이성적으로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양이 제한되어 있다고 했다. 가장 어렵지만, 중요한 걸 먼저 하기로 결정했다. 아침에 가장 어려운 서재를 정리하고 그 후 만만한 옷방과 부엌을 정리할 예정이다.
서재에서 정리할 것들을 미리 분류하고 한대 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은 12시 14분. 오늘도 자정이 넘었는데 아직 서재에 있다. 세미나 준비와 도움을 줄 게 있어 이번주는 계속 늦게 잤는데 내일 있던 거의 모든 외부 일정을 취소했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날이 내일 밖에 없고 꼭 지키고 싶었다.
계획을 적다 보니 내일은 저녁을 먹고 일지를 쓰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시간이 전혀 계획되어 있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현재의 계획에서는 무언가를 줄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는 걸 봤다.
더 짧은 시간에 힘 있게 할 수 있을까?
시간을 더 주어야 하는가?
이번주 분명히 이틀은 쉰다고 했는데. 그걸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인가?
늦게까지 글을 적고 조금 늦게 일어나야 하는가?
내일 기분 좋은 노래를 들으며 멋진 공간을 창조해 보자.
필요 없는 물건,
현재 나에게 힘이 되지 않지만, 공간과 내 머릿속을 동시에 차지하는 물건에게
그동안 내 삶을 빛내 줘서 고마웠다고 충분히 인정하고
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빠르게 분류만 하고 침대로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