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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Oct 18. 2023

냉장고와 똥차로 키운 수염이

중고에 대한 이야기

 서울의 골목길을 짧은 다리로 열심히도 쫓아다녔다. 높은 오르막을 겨우 오르면 시작되는 깎아지르는 내리막과 꼬불꼬불 아주 긴 길을. 엄마는 바쁘니까 걸음이 빨랐고 뒤처진 어린이는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불러세워야 했다. “엄마!!!!!!!!! 혼자 가지마!!!!!!! 기다려줘!!!!!!!!!!!” 엄마는 잠시 기다리다가 우리가 채 만나기도 전에 다시 걷기 시작해 거리를 벌린다. 나는 쫓아가다가 불러세우기를 목적지까지 반복했다.

 경주마 같은 엄마를 멈춰 세우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나는 아는 아줌마를 만났을 때이다. 그럴 때면 어린이는 여유롭게 따라잡고도 기다려야 했다. ‘바쁘다면서 한번 시작하면 기본 삼십 분이야.’ 마음속으로 흉을 봤다. 멀뚱히 서서 이야기가 끝나도록 기다리는 게 지루하고 싫었다. 그래서 어딜 갈 때면 ‘오늘은 길에 아줌마들이 없기를’ 속으로 바랐다. “오늘은 아줌마 만나도 길게 얘기하면 안 돼! 인사만 하고 헤어져.”하고 엄마에게 다짐을 받아내기도 했다.

 어린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른 넘은 어른이는 이해하고도 안쓰러운 순간이다. 돈 쓸 것이 무서워서 친구도 안 만나는 사람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부업과 아르바이트를 하고 성질 나쁜 남편이랑 사느라 쉴 새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길에서 만난 아줌마가 반갑고 잠깐의 수다가 소중했겠지.


 경주마를 세우는 또 다른 순간은 골목이 쇼룸이 될 때이다. 평소에 필요한 물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골목에서 발견하면 멈춰서 살펴보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집에 있는 물건은 모두 주워 온 것들이었다.

 “멀쩡한 물건을 왜 버렸데?”

 어린 마음에 자기 집 앞에 버려둔 물건을 우리가 기웃거리는 걸 주인이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다. 하지만 가난을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어린이였으므로 속으론 좀 부끄러워도 겉으로는 엄마의 쇼핑을 도왔다. 디자인의 포인트가 멋지고, 흠집은 이것밖에 없으며 집에 가져간다면 어떤 용도로 쓰임새가 있을지 어른스럽게 평했다.

 “저녁에 아빠랑 가지러 와야겠다.”

 그렇게 주워 온 물건들로 우리는 살았다. 실용적인 것뿐만 아니라 진품명품에 보낼 농부 그림 액자나 하얀 도자기도 있었다. 발바닥처럼 생긴 길쭉한 돌도 있었다. 아빠는 “이건 모양이 특이해서 비싸게 팔 수 있어.”라며 어린 자식들에게 허풍을 쳤다.


 ‘주운 물건에 귀신이 들어있다.’ 충격적인 친구의 말에 어린이는 너무 무서웠다. 그 친구는 몰랐겠지만 조금 과장해서 우리 집에는 안 주워 온 물건이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실제로 자아가 깃든 아이가 있었다. 그 이름은 냉장고. 걔는 정말 시끄러운 애였다. “우우우웅 에에에엥 드드드드드 꾸루루루룩......” 다른 애들은 조용한데 얘는 이렇게 나댔다. 4인 가족의 음식을 저장해 주는 일이 힘들었나 보다. 인간의 말로 한다면 아마도 “나 일하기 싫어. 이제 힘들어. 제발 죽여줘!”였겠지. 도저히 힘들어서 못 버틸 땐 오줌을 지려서 부엌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엄마! 냉장고에서 또 물 샜어!”

 “수건 가져와!”

 우린 쪼그려 앉아 수건으로 뒤처리했다.


 아빠는 화물차로 돈을 벌었다. 중고로 구매한 그 화물차를 어른들은 ‘똥차’라고 불렀다. 어린이들도 따라서 ‘똥차’라고 불렀다. 우리는 명절에 똥차를 타고 조부모를 만나러 갔다. 운전석과 조수석 의자 뒤에 좁고 긴 짐칸이 있었다. 거기에 나와 동생이 탔다. 어린이들은 좁고 긴 공간에서 놀기 전문이다. 끝말잇기도 하고 한국을 빚낸 100명의 위인도 부르고 싸우기도 했다.

 어린이들의 몸이 커져서 짐칸에 앉을 수 없어지자, 조수석에 세 명이 앉아야 했다. 조수석의 정원은 두 명이지만 말이다. 세 자리는 각각의 성격이 다르다. 운전석 바로 옆자리는 내가 선호했던 자리이다. 운전자의 기어 조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책임감으로 버텨야 하는 자리로서 장녀에게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가운데 자리는 엄마에게 추천하는 자리로 아무래도 낑겨 있어야 하지만 편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어린이들이 양옆에서 좁다고 싸워대는 게 괴로웠겠지. 허허. 동생에게 추천하는 자리는 문 옆자리이다. 이 자리는 좀 기술이 필요한 자리인데 두 사람이 먼저 앉고 나면 선 채로 탑승한다. 문을 먼저 닫고 엉덩이를 그저 내맡기면 나머지는 중력이 해결해 준다. 요란하고 시끄럽게 탑승한 뒤 각자 버티면서 가는 거다. 싸우거나 잘대거나 흥얼대거나 하면서 말이다.

 ‘똥차’라는 명칭은 시원찮은 차의 상태를 뜻하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그 ‘똥차’에 물건을 싣고 먼 지방까지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달렸다.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졸음을 물리치며 ‘똥차’에 젊은 목숨을 걸었다.


 ‘똥차’ 타던 어린이 아니랄까 봐 어른이 되어서 첫 차로 09년식 마티즈를 구매했다. 2020년 1월의 일이다.  고모부가 운영하는 중고차 매매센터에서 300만 원인가 내고 샀다. 무난한 흰색이거나 검은색이길 바랐는데 전체 흰색에 범퍼만 검은색이었다. 이상한 생김새라고 생각했으나, 선택권은 없었다. ‘수염이’라고 이름 지었다.    

  

수염이의 얼굴


 당시에 면허를 딴 지 5년이 넘었으므로 아빠에게 운전을 다시 배웠다. 우선 나는 지도앱으로 출근길과 퇴근길 운전순서를 외웠다. 어디서 몇 번 차선을 변경해야 하는지까지 말이다. 이후 실전에서 출근할 때 내가 운전하면 아빠가 조수석에서 지켜봤다. 주차까지 한 뒤 아빠가 수염이를 끌고 집에 갔다. 퇴근 시간에는 아빠가 수염이를 회사 앞에 데려오고 또 내가 운전해서 집에 갔다. 2~3주 정도 아빠가 조수석에서 코치했고 이후 나 혼자 운전하되 일주일 정도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켜둔 채 아빠가 트럭을 몰고 뒤따라왔다. 아빠와 무엇인가를 함께 한 게 30년 평생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었다.


 수염이는 귀여운 경차였지만 열쇠는 흉기처럼 크고 길었다. (지니고 있으면 든든한 호신용품이 된다) 열쇠를 잠그면 동그란 두더지가 쏙 들어간다. 열면 쏙 올라온다. (아, 두더지라고밖에 설명 못하겠는데 읽는 사람이 이해할까?) 열쇠로 트렁크도 여닫는데 두세 번 여닫은 이후로 고장 나서 그냥 잠그지 않고 다녔다. 스케이트보드를 넣어두었는데 도둑맞지 않았다.



문을 잠그고 열 때 두더지처럼 들어가고 나오는 이것.



 수염이는 손이 많이 가는 자동차였다. 기어변속만 자동이었고 나머지는 수동으로 조작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우선 시동을 꺼도 라이트는 꺼지지 않는다. 꺼야 하는 걸 까먹어서 자주 방전됐다. 다들 퇴근하는데 나 홀로 주차장에서 긴급출동을 기다려 놀림 받았다. 이후 20분간 시동을 유지하기 위해 퇴근하지 못하고 동네를 돌아야 하는 쓸쓸함은 덤이다.



긴급출동. 제일 먼저 퇴근한다고 나간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사진찍어서 놀리던 동료분들. 하늘 참 예쁘네요.



 내비게이션이나 블루투스가 없어서 차와 소통하거나 연결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핸드폰 스피커로 내비게이션과 음악을 들었다. 수염이의 송풍구는 동그란 모양이고 눈꺼풀 모양으로 덮여있다. (눈꺼풀이라는 설명을 이해할지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찌르면 눈꺼풀이 올라가면서 열린다. 눈꺼풀을 내려주면 닫힌다. 핸드폰 거치대를 달면 무게 때문에 자꾸 눈을 감아서 고정하기 힘들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핸드폰도 달고 선풍기까지 달았다.



눈꺼풀 모양의 송풍구



 그런 수염이를 좋아했지만, 가끔 난처할 때가 있었다. 처음 자동 세차를 할 때였다. 수염이의 사이드미러는 한쪽씩 손으로 닫아야 한다. 이를 위해 창문을 맷돌 돌리듯이 돌려서 열어야 했다. 열심히 돌리는 내 모습을 보이는 게 자존심 상해서 최대한 어깨를 고정한 채로 자동 창문인 마냥 연기했다. 팔을 꺼내 사이드미러를 닫았다. 다시 맷돌을 돌려 창문을 닫았다. 열연을 펼친 보람 없이 반대쪽 사이드미러를 닫기 위해 조수석으로 거의 눕고 팔을 뻗어 창문을 돌렸다. 그리고는 사이드미러를 닫기 위해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으로 기어가야 했다. 직원이 보기에 참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을 것이다. 주차 요금을 낼 때, 통행료를 낼 때 이따금 땀이 삐질 났다.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 해요.



 수염이로 장롱면허에서 탈출했다. 아빠에게 다시 운전을 배워 매일 출퇴근했고 외근도 나갔으며 뚜벅이인 회사 동료도 태워줬다. 주말에는 파주에서 서울로 친구도 만나러 가고 파주에서 연천으로 엄마와 드라이브도 다녔다. 그렇게 2년쯤 사고 없이 수염이와 함께 했다.

 평생 살았던 서울에서 파주로 이사왔고 뒤늦은 나이에 취직해 뭐 하나 쉽지 않았던, 서툴기만 한 사회초년생 시절의 내 모습을 닮은 수염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다.



'수염이'의 뒷태


 냉장고와 똥차와 수염이를 처음 샀을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우리 가족이 이렇게나 오래 우당탕탕 이 물건들과 살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새 물건으로서 쓰임이 다 한 걸 헌 물건인채로 잘 사용하는 우리 가족이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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