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킹홀리데이
3월이 되자 우리는 휘슬러에서 차를 빌려 시애틀로 향했다. 가까운 밴쿠버 조차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드디어 몇 개월 만에 휘슬러 산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일과 일 그리고 스노우 보드로 빈틈없는 날들을 보낸 지 3개월이다. 시즌이 끝나면 떠나려 했던 휴가였다. 왜인지 모르게 그냥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호텔 직원 숙소에서 함께 지내는 룸메이트들과 시즌으로 바쁜 호텔을 뒤로하고 과감히 일주일 휴가를 냈다. 그리고 우리는 휘슬러에서는 할 수 없었던 짓들 (필요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닌 사치를 위한 쇼핑이라든지, 누군가가 여기에 왔는데 가보지 않으면 바보라고 하는 곳들을 간다든지, 불빛이 존재하는 야경을 본다든지 등)을 하고 돌아왔다. 체력이 많이 필요한 하우스키핑과 서빙 일을 하면서 몸은 늘 지쳐있었지만 질리지 않는 휘슬러의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는 그 모든 것을 잊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도 반복되는 일상에 결국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여행으로 인해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잠시 나태했던 나를 반성하고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부지런히 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이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태평양 건너 저 멀리 판을 치고 있었던 코로나가 어느새 캐나다 그리고 휘슬러 안까지 침투해버렸다. 서빙으로 일하고 있었던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고 하우스키핑으로 일하고 있었던 호텔은 급격히 떨어지는 투숙률로 모든 스케줄을 취소해 버렸다. 기숙사에서는 당장 방을 빼라는 통지를 받았다. 일과 집을 한꺼번에 잃었다. 일자리를 잃은 대부분의 워홀러들은 짐을 싸서 본국으로 돌아갔고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던 휘슬러는 작은 소음마저 없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정들었던 동료들과 인사를 제대로 할 겨를도 없이 헤어졌다. 3월 한 달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반년 동안 휘슬러에서의 워홀 생활은 나의 인생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찼다. 얼떨결에 떠났었던 캐나다에서 모든 일이 운명처럼 일어났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나의 워홀 생활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버티고 싶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남아있고 싶었다. 앞서 내가 했던 다짐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것처럼 두 번째 다짐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는 부모님은 비행기 티켓을 보내왔고 나는 그렇게 허무하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재난 사태가 금방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겠다는 나의 마음은 확고했다. 2주간의 보건소의 감시 아래 격리 생활을 끝마치고서는 나는 바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바뀌는 정책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국경을 아예 막아버렸던 캐나다는 다행히도 고용 증명서가 있으면 입국이 가능하다고 입장을 바꿨다. 그렇게 나는 휘슬러 구인구직 공고 사이트에 올라온 모든 곳에 이력서를 돌렸다. 하지만 한국에 있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 밴쿠버를 넘어서 다른 지역까지 확대해 나의 이력서를 뿌렸다. 어느 지역 어느 곳에 넣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몇 번의 인터뷰 기회까지 얻었지만 고용 증명서를 얻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주위에서는 왜 그렇게 못 돌아가서 안달이 났냐고 했다. 나는 정말 안달이 났었다. 물론 돌아간다 한들 그 전과 똑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행기 표를 보낸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무시할 깡다구가 없었던 나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데 말이다.) 몇 개월의 방황 끝에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나의 의지는 비자 만료 시점이 다가오면서 점점 시들어져 버렸다.
1년 전 구체적인 계획 하나 세우지 않았던 나는 일단 빅토리아로 무작정 떠났다. 그리고 밴쿠버를 거쳐 휘슬러에서 본격적인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시작했다. 곳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에서는 쉽게 해보지 못할 일들을 했고 일 년에 한 번 탈까 했던 스노우 보드를 매일 아침마다 탔다. 그동안 살아왔던 날들에 비해 반년이란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 하지만 휘슬러에서의 워홀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고 깊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추억들을 뒤늦은 기록으로 하나씩 적어 간직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