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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키핑 pt.2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by 현쥴리

언제가 일본으로 료칸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식사를 하고 오면 따듯한 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목욕을 하고 돌아오면 이부자리가 깔려있었다. 우렁각시가 다녀간 마냥 방은 항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방을 비울 때마다 무언가 해놓고 가는 직원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그들의 배려와 섬세함에 감탄을 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방 안에서 내가 할 노동이라고는 누워서 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얼마나 완벽한 휴식인가. 그 어디서 받았던 것과는 다른 훌륭한 서비스다. 물론 그러한 서비스를 받기 위해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했지만 그 가치는 비용을 뛰어넘어서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손님을 위한 것인 만큼 일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아진다. 손님들이 숙박을 하는 동안 객실을 빈틈없이 완벽한 상태를 유지시켜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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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린 호텔 발코니에서 바라본 전경

내가 일을 했던 호텔에서는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턴다운 서비스’로 불리는 오후에 제공하는 하우스키핑 서비스다.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 놓아주는 오전 서비스와 다르게 오후에는 필요한 것들이 가까이에 위치하도록 가져다 놓아준다. 와인 아이스버킷에 얼음을 가득 채워주고 침대 옆에 마실 물을 떠다 놓는다. 오전에는 침대가 나를 괴롭혔다면 턴다운 서비스 때는 또 다른 침대가 나를 괴롭혔다. 호텔의 모든 객실의 소파는 침대로 변신할 수 있는 아. 주. 좋. 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아이가 있는 방 혹은 인원수가 많은 방에는 소파를 열어 침대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성인들만 있는 방에서는 별 탈 없이 임무를 끝내고 나오지만 아이가 있는 방에서는 아이들과 전쟁을 치루기도 한다. 여러 단계를 거쳐서 열어야 하는 소파베드에 친절히 도 한 단계가 끝날 때마다 그 위에 드러눕는 재롱을 보여주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진취적인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나 대신에 소파를 열도록 지시한다.


“이 시간에 너를 위해서 일을 하러 왔어. 네가 자야 할 곳이니까, 너도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


“네가 오늘 쓸 침대를 이 분이 만들어 주고 있어. 너는 이 분에게 아주 감사해야 해. 네가 오늘 밤에 잠을 잘 수 있는 건 이 분 덕분이야.”


아이들의 훈육을 위한 말들이었겠지만 나를 정신 차리게 해주는 고마운 말들이었다. 어느샌가 익숙해진 생활에 직업의식이 무뎌질 때쯤 외노자 생활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문득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여기에서! 이런 고생을!이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그것은 스스로 하찮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아이들이 깊은 잠에 들 수 있게 소파를 펼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소파를 열어주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부모님 사이에 끼여 몸이 구겨진 채로 불편한 잠을 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신승리)


오전과는 달리 턴다운 서비스는 더 많은 방을 담당하게 된다. 오전에 일을 할 때는 10개 넘는 방에 들어가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턴다운 서비스는 한 사람당 20개 넘게, 아주 바쁠 때는 30개가 넘는 방에 들어가게 된다. 시간 내에 일을 끝내려면 오전보다 몇 배는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투숙률이 100% 가까이 올라가는 겨울 시즌에는 아무리 부지런히 옮겨 다녀도 야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짭짤하게 들어오는 야근 수당을 생각하면 늦게까지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줄어들지 않는 남은 객실 수를 보고 있으면 곧장 콜 식을 때리고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오전에 일을 할 때는 손님들이 대부분 외출 중일 때 서비스를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턴다운 때에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객실에 머물러있다. 일본의 료칸처럼 우렁각시처럼 다녀가고 싶지만 여기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정중히 서비스를 거부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요구사항이 더 많아진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오전 타임 직원들이 채워놓은 커피 바의 비품들이 금세 비워졌거나, 새것으로 걸어놓았던 수건들이 여기저기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새 리넨으로 바꿔놓았던 침대 위에서 방금 전 레슬링 시합이 끝난 것 같은 상태이던가, 등등 오전과 같은 서비스를 원하는 손님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나의 방 청소가 끝이 없듯이 남의 방 청소에도 끝이 없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느낄 수 있었다.

IMG_0421.JPG 초록 카드가 올려져 있으면 턴다운 때도 침대의 린넨을 새것으로 바꿔주어야 한다. (으악)

턴다운에서는 손님들이 팁을 잘 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동료들에게 들었다. 애초에 오전 서비스 때도 팁을 잘 받지 못하는 타고난 운이 있기 때문에 더욱이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동안 받지 못했던 팁이 턴다운만 하면 쏟아져 나왔다. 턴다운 서비스 스케줄을 받은 첫날부터 100불 가까이의 팁을 받으며 나의 턴다운 기적이 시작되었다.

IMG_1146.JPG 꽤 오래 머문 어느 노부부의 방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던 팁

몇 안 되는 직원이 수많은 객실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주로 담당했던 객실을 다시 배정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후에는 손님들의 대부분이 객실에 머물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방에서 손님과 마주치게 된다고 보면 된다. 그 말은 즉슨, 일주일 내내 턴다운 스케줄을 받게 된다면, 그 기간 동안 같은 방에 투숙하는 손님들과 매일 마주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덕분에 각 방마다 어떤 손님이 머무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물론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 손님들도 있지만 스몰토크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은 내가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동안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말을 걸어온다. 아직 처리해야 할 남은 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때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얼른 객실을 빠져나와야 하지만 대화에 흥미를 붙인 손님들의 말을 자연스럽게 끊는 재주가 없었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지만 객실을 나가기 전에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건네주며 인사를 하는 손님들에게 나도 모르게 나의 덧니를 자랑하듯 환한 미소를 짓게 된다. 팁을 받을 때면 돈에 굴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렴 돈이 최고다.

IMG_9978.JPG 휘슬러 산 위에 있는 올림픽 오륜기

팁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내가 오전에 일을 하는 것보다 오후에 일을 하는 것을 선호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늦은 출근 시간으로 인해 오전 시간을 산 위에서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턴다운 스케줄을 받는 날이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산 위로 향했다. 호텔에서 스키장 곤돌라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한국과 달리 야간개장 따위는 없는 휘슬러에서는 보드를 즐기기 위해서 오후에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턴다운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 덕분에 나는 출근 시간 직전까지 매일 아침마다 보드를 즐길 수 있었다. 오전 내내 보드를 타고 30개 가까이 되는 방을 돌아다니며 소파를 열고 다니면 나의 몸과 정신은 나의 것이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다. 언젠가 보드를 타다 왼쪽 어깨로 추락한 아찔한 상황이 있었다. 한동안 팔을 움직이지 못해 모든 일을 한 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보드도 일도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도 그 생활을 즐긴 것은 확실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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