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매일 들어가는 똑같은 방이지만 그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방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우스키핑 일을 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의 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휘슬러에서 몇 안 되는 5성급 중에서도 가장 고가의 호텔인 이 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손님들이다. 연예인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가지고 다니는지에 대해 모든 관심이 집중되듯이 나는 이 곳에 머무는 손님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가지고 다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소지품 고르기를 통해서 파트너를 정하는 옛날 옛적의 미팅처럼 소지품은 그 사람의 개성과 취향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까지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 취향과 수면습관 심지어 그들이 겪고 있는 질병까지도 모두 다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을 하우스키퍼라는 정당한 자격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물론 온갖 지저분한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변기를 닦는 행위를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게 되지만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체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여행을 위해 신중히 싸온 짐들을 내 손으로 직접 정리를 해주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치욕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의 옷장은 어느 명풍관 못지않게 화려했다. 각 브랜드별 시그니처 아이템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각 객실의 옷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루는 호주 친구와 페어가 되어 일을 한 적이 있다. 어느 한 객실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시계를 보고 그 친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칭 시계 마니아라고 하는 그녀는 그 시계가 얼마나 대단한 시계인지 마치 브랜드 홍보팀에서 나온 듯 나에게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시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그 시계의 가격을 듣고서는 그 시계는 더 이상 액세서리가 아닌 황금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액세서리 하나까지도 모르고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대체로 고가의 소지품들이 있는 객실에서는 간혹 소지품이 사라졌다는 컴플레인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우스키퍼들은 강력한 용의자가 된다. 손님들은 문을 열자마자 대뜸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오전에 일을 할 때는 같은 방을 연속해서 들어가는 경우가 드물다. 또한, 그들의 귀중한 소지품들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 있지만 훔쳐갈 마음은 전혀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의심하는 손님과 ‘좋은 말 할 때 사실을 털어놓으렴’이라는 무조건 적으로 손님 편인 매니저의 떠보는 말들 속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결백을 주장해야 하는 억울한 상황이 발생한다. 대부분 유실물이 발생했다는 신고가 들어온 객실의 상태를 보면 그들이 찾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컴플레인을 걸기 전에 정리정돈 습관을 기르는 것을 마음속으로 제안해본다.
하우스키핑은 안타깝게도 팁을 받는 직종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고 고맙게도 팁을 남겨주는 손님들이 꽤 있다. 모든 하우스키퍼들의 공통점은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로 향한다는 것이다. 주로 침대 위 혹은 그 옆 사이드 테이블에 팁이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간혹 가다 팁만 가져가고 방을 바꿔달라는 얌체 같은 직원들도 있다. 이미 배정받은 객실일지라도 다른 직원에게 넘어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복도에서 직원들끼리 보이지 않는 육상경기가 펼쳐진다. 그깟 팁이 뭐길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팁이 의외로 쏠쏠하다.
손님이 체류 중인 방에서 지폐가 애매한 위치에 꺼내져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동료직원들과 토론이 시작된다. ‘그건 명백하게 팁이야’라는 답정너 같은 대답을 듣고 싶지만 의견이 나뉜다. 그럴 때면 아쉽게도 그 자리에 두고 나온다. 그깟 몇 푼으로 도둑으로 몰리고 싶지는 않다. 이럴 때면 명확하게 고맙다는 말이 적혀 있는 쪽지와 함께 팁을 둔 경우에는 아주 감사하다.
손님이 머물고 떠난 객실에서는 팁 외에도 기대가 되는 것들이 많다. 손님들이 머물고 있는 동안에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식품들은 우리들의 뱃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밴쿠버에 비해 물가가 비싼 휘슬러에서 그리고 기숙사 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손님들이 남긴 음식은 일용한 양식이 된다. 손님들이 두고 간 식료품들 (주로 시리얼, 과일, 과자, 각종 소스들)은 우리가 챙겨갈 수 있다. 언젠가 한국 손님이 머물고 간 객실이 있었다. 그 방에서 나온 떡볶이 조리식품은 한국인 직원들 사이에서 팁 보다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었다.
남겨진 술들은 공식적으로 하우스키핑 오피스에 반납을 해야 한다. 보트카, 위스키, 와인, 맥주 등 그 종류는 다양하다.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객실에서 나온 술병들을 순순히 오피스에 가져다주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이 마음은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객실에서 남은 술이 나오게 되면 우리에게 비공식적인 임무가 생기게 된다. 이름하여
‘무사히 기숙사 방으로 옮기기’
술병의 크기가 작거나 한 두 캔 나오는 경우에는 자신의 재량껏 가져오지만 크기가 크거나 박스채로 나오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료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 숨길 공간을 제공해주던가, 망을 봐준다거나, 길을 터주거나 등등 객실에서 기숙사까지 무사히 후송해야 하는 임무를 각자 맡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술파티가 열린다. 평생 접해볼까 말까 했던 술들을 이때 다 마셔본 듯하다.
손님들이 미쳐 챙겨가지 못한 소지품들도 있다. 그런 물건들은 손님들이 다시 찾아갈 의사가 없거나 3개월 동안 어떠한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호텔 직원들에게 돌아간다. 손님들의 분실물에서는 꽤나 좋은 물건들이 많이 나온다. 각 종 브랜드의 옷가지들 혹은 값비싼 전자제품들이 우리들 손에 들어오기도 한다. 언젠가 고프로를 가져간 동료가 배 아플 정도로 부러웠다. 겨울 시즌에는 스키, 보드, 부츠 등 겨울 스포츠 용품들을 대놓고 버리고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사이즈가 맞는 직원이 가져가게 된다.
손님들의 소지품들 그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나에게 모두 흥미를 가져다주었고 힘든 순간에도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우스키퍼로 지내면서 회의감이 들 때마다 동기가 부여되었던 것은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이 사실들을 안다면 굉장히 속상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