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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만해, 투잡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by 현쥴리


휘슬러에서 지낸 지 한 달쯤 지났을 때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던 하우스키핑 일은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고 일을 하면서 느끼는 고통도 줄어들었다. 호텔 객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덕분에 나의 걸음은 늘 만보가 훌쩍 넘어있었다. 육체적인 노동으로 인해 따로 운동이나 식단관리를 하지 않아도 나의 몸은 (초기에만) 점점 말라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끝마치면 잠시도 쉴틈 없이 동료들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빌리지의 맛집 도장깨기는 물론 수영과 스케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썰매를 타거나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모든 체력을 다 쓰고 나서야 잠에 드는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나의 몸은 근질거렸다.

IMG_8860.JPG 점점 쌓여가는 눈

일을 하면서 그리고 빌리지를 돌아다니면서 나의 시선은 항상 산 위로 향해있었다. 푸릇푸릇했던 산 꼭대기 위는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점점 밑으로 내려와 앉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았다. 이 거대한 산들이 언제쯤 흰 눈으로 뒤덮일까. (작년에 비해서 눈이 늦게 내린 탓에 시즌이 뒤로 밀려버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눈은 조금씩 꾸준히 내렸고 마침내 산은 물론 마을 전체가 흰 눈으로 뒤 덥혔다. 눈이 쌓이면 쌓일수록 호텔은 바빠지기 시작했고 빌리지의 주차장에는 각양각색의 차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번 겨울 시즌을 휘슬러 산에서 보내기 위해서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스키어와 스노보더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스키와 스노보드만을 위해서 떠나온 워홀러들은 자신들의 장비를 정비하며 출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이런 광경들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쌓여가는 눈을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은 설레었다. 나도 무언가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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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지에 있는 야외스케이트장. 그 옆에서는 눈썰매를 탈 수 있다.

이곳에서의 시즌권의 정가는 1449$ (세금 전)이다. 물론 다양한 할인 방법도 있고, 일을 하고 있는 포시즌스 호텔에서 직원들에게 시즌권 할인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 모든 할인 수단을 동원한 가격마저도 나에게는 저렴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보드 장비를 마련해야 할 지출도 생각해야 했다. 돈을 모으기는커녕 빚을 내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최대한 돈을 절약하면서 겨울 시즌을 재미나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있지 않을까.


스키장 소속으로 일을 하면 시즌권이 무료로 제공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파트타임도 포함된다는 말에 나는 바로 구인광고를 뒤졌고 산 위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Food Runner’를 뽑는다는 공고를 발견했다. 나는 레스토랑에서 일해본 경험이 전무했다. 게다가 레스토랑은 파인 다이닝으로 휘슬러에서 손꼽히는 고급 레스토랑 중 하나였다. 나를 뽑아줄지도 의문이었다. 아직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곳을 머릿속에서 마음대로 상상하며 내가 일을 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두려웠다. 하지만 그깟 두려움은 ‘1449불’을 생각하면 금방 이겨낼 수 있었다. 면접에서는 손님을 대했을 때의 상황보다는 동료 직원들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이 대다수였다. 혼자 일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동료들의 소중함과 협동심의 중요함에 대해 열심히 주절거렸다.


‘쥴리! 산 위로 올라와!’


면접을 보고 며칠 후 직원카드(=시즌권)를 받고 출근하라는 메일을 받았다. (전산과정에서 나를 미국 스키리조트 소속에 있는 기술자로 잘못 등록하는 바람에 아주 골치 아픈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여기서의 일처리는 늘 답답하다. 사무실에 찾아갈 때마다 직원들은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한 달 만에 직원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었고 카드가 발급되었던 순간 현장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IMG_1665.JPG 호텔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복도마다 직원들의 장비들이 세워져 있다.

빌리지에 있는 대부분의 매장들이 스키장 리조트에 소속되어 있다. 직원카드는 그야말로 골드카드였다. 리조트 소속 매장에서는 기본으로 20% 할인을 제공해 주었고 아주 많게는 40%까지도 지원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보드 장비를 모두 새것으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고 쇼핑은 물론 다양한 먹거리들을 아주 저렴하게 즐길 수 있었다. 호텔에서 주 5일 스케줄을 받고 있는 나에게 레스토랑은 주 2일 스케줄을 배정해 주었다. 일주일에 단 이틀 일하는 파트타이머인 나에게 과분한 혜택들이었다. 무료 시즌권과 다양한 직원 혜택들을 위해서 휴일 없는 일주일 노동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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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할인 받고 산 새 장비들. 기숙사 복도에는 장비 스탠드가 있다. 자리 싸움이 치열하다. 먼저 이름을 써놓아야 뺏기지 않는다.

문제는 정작 보드 탈 시간이 없었다. 시즌권을 온갖 고생 끝에 얻어놓고서는 보드 탈 시간이 없다니. 레스토랑 운영시간은 스키장 오픈 시간과 동일하기 때문에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는 날에는 보드를 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호텔에서는 오후 스케줄을 받은 덕분에 오전에 잠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스키장과 호텔 거리는 걸어서 5분 거리로 매일 호텔 출근 전 새벽에 일어나 3~4시간 동안 라이딩을 즐기다 바로 출근을 했다.

IMG_9265.JPG 첫 출근날 오픈을 기다리면서

본업, 시즌권을 위한 부업, 스노보드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 피로와 부상들이 쌓여 결국 병가를 내버리는 사태가 생기기도 했지만 이런 날에는 언제 또 하루 종일 산 위에 있어보겠냐며 결국 다시 또 보드를 들고 산 위로 향하고 있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국가대표 마냥 부상을 안고서 시간을 쪼개어 매일 산으로 향했다. (그러다 결국 정말로 병원을 가게 되었다.) 하루가 24시간뿐이라는 것과 나의 체력이 이 정도뿐이라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나의 시간과 체력을 맞바꾼 생활들이었지만 돈을 쓰기는커녕 돈을 벌며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나를 가장 뿌듯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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