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킹홀리데이
휘슬러 정착을 자축하기 위한 저녁 식사를 할 겸,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구할 겸, 동네 정찰을 해 보기로 했다.
모든 것이 멈춰있다. 삐죽삐죽 튀어나와 정돈되어있지 않은 풀들로 뒤덮여 있는 산 그리고 검은 천막과 노끈으로 묶여 운행을 중단한 리프트.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의 스키장의 모습이다.
진부한 생각이었다. 10월 중순, 한창 가을인 이 곳에는 예상과는 다르게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당장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아도 휘슬러는 아무래도 겨울 휴양지이다. 여름은 진작에 끝이 났고, 산 위에는 눈곱만큼의 눈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지금 이 산골짜기 마을에 모여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머리에는 오토바이 헬멧이 써져 있었고 각자 산악자전거를 옆에 끼고 있었다. 그리고는 리프트를 타기 위해 길게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리프트는 자전거와 사람들을 운반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리프트를 기다린다고? 이미 산 위에서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온갖 묘기를 부리며 아주 빠르게 역동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백발의 할아버지, 젊은 여자, 꼬마 아이들 등 나이와 성별은 불문해 보였다. 산에서 막 내려와 자전거에서 내린 사람들의 몸에는 온갖 진흙으로 뒤덮여져 있었다. 그들은 방금 무언가 굉장한 일을 해낸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새로웠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스포츠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흥미로운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전거를 끌고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지만 리프트 티켓 값의 가격을 보고 구경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또한, 아쉽게도 그 날이 다운 힐 하계시즌의 마지막 날이었다. 내년 여름에는 구경꾼이 아닌 다운 힐 라이더가 되어 보기로 했다.
신기한 광경을 관람한 뒤 나는 지도를 끄고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차가운 느낌의 높은 빌딩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도시와는 다르게 빌리지에는 낮고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하지만 도시 사람들이 휘슬러를 ‘시골’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에 비해서 빌리지에는 없는 것이 없어 보였다.
슈퍼마켓, 약국, 병원, 도서관뿐만 아니라 노스페이스, 파타고니아, 갭 등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샵들은 물론 커리, 초밥, 피자, 스파게티, 브리또 등 각국의 레스토랑도 존재했다. (그 어디를 가도 있다는 한식과 중식이 아쉽게도 없었다.) 펍과 클럽은 건물 곳곳에 위치해있다. 헬스장과 영화관(기생충을 본 곳)도 있다고 하면 끝 아닌가. 이 모든 것들이 한 곳에 모여 그 어디를 가도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살고 있는 곳보다도 좋은 것 같았다.
당당하게 휘슬러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말은 했지만 도시 사람들의 계속되는 휘슬러 험담에 사실은 조금의 두려움이 있었다. 다행히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제 막 도착해서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떠한 선택에 앞서 끼어드는 누군가의 말은 참고할 만한 조언일 뿐 충고로 받아들여 괜히 쫄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곰을 조심해!’라는 표지판이 여기저기 깔려 있는 이곳의 기념품샵에서는 비상으로 쓸 수 있는 곰 스프레이와 곰 휘슬을 팔고 있다. (오로지 기념품용인지 실제로 효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만큼 곰의 출몰이 잦다고 하지만 정작 곰을 봤다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실제로 반년 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서 곰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흔하면서 귀한 존재인 곰을 나는 운이 좋게도 휘슬러 1일 차에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배회하고 있는 빌리지에서 곰이 떡 하니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하지 않은 척 그 앞을 지나가려는 순간 큰 갈색 털 뭉텅이가 움직이고 있었다. 곰이었다. 그 말로만 듣던 곰이었다. 아기 곰이 궁둥이를 씰룩 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곰과 마주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1. 죽은 척을 한다. 하지만 ‘척’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곰이 나를 괘씸하게 보고 무자비하게 집어삼키지 않을까.
2. 뒷모습을 보이지 않고 아주 천천히 그대로 뒷걸음을 치며 도망간다.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리 힘이 풀려 그대로 기절할 것 같다.
3. 온갖 소리를 지르며 몸짓을 크게 해 내가 더 거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자살행위 같다.
곰의 종류에 따라서 행동을 달리 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포악한 곰은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을 줄 것 같지 않다. 다행히도 빌리지에서 만난 곰은 순한 곰이었다. 곰과의 만남이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아 허무했지만 오히려 이 편이 다행인 것 같다. 곰을 실제로 본 적 이 있어야 비로소 휘슬러 로컬(주민)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나는 휘슬러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로컬이 되었다.
휘슬러와의 첫 만남은 묘하게 설레었다. 이곳이라면 내가 원했던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지내게 될 나날들에 대해 기대감을 품으며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