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 대상이 아닌 영화 그 자체로 존재하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여성의 몸에 관한 영화다. 고전적인 영화 문법상 여성 신체는 성애화 또는 비체화 돼왔으며, 도구이자 수단으로서 소모되곤 했다. 옷을 갈아입거나 샤워하는 여성을 몰래 엿보는 남성, 온몸으로 거절하는 여성을 강간하는 남성, 여성의 신체를 잔인하게 훼손하고 끝내 살해하는 남성…. 남성은 행위자, 여성은 대상이었다. 여성의 몸은 남성 주인공의 정의감을 불타오르게 하는 각성제,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목적, 파국을 부르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이 과정에서 몸의 주인인 여성은 말끔히 지워졌다. 그러나 ‘더 페이버릿’에서 여성의 몸은 쇼트 곳곳에 자유롭게 존재하며 오히려 영화 전체를 장악한다.
영화를 이끄는 세 여성 애비게일(엠마 스톤), 사라(레이첼 와이즈), 앤(올리비아 콜맨)은 각각 하녀, 귀족, 여왕 신분으로, 각자의 지위에 따른 권리를 가졌다. 애비게일 또는 애비게일의 몸은 여성이 가진 신체적 자기결정권을 보여준다. 남성들의 소유나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애비게일은 여왕 앞에서 서슴없이 무릎을 꿇지만 이는 온전히 자신의 출세를 위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타의에 귀속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례로 애비게일은 마샴(조 알윈)을 밀쳐내고 때리다가 내팽개친다. 가볍게 입을 맞추는 행위조차 애비게일이 '키스해'라고 말할 때에만 가능하며 ‘분위기’라는 이름의 강압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즐거운 표정으로 마샴을 희롱하는 애비게일의 얼굴은 이제껏 벽에 밀쳐지거나 머리채를 잡힌, 굶주린 포식자 앞에서 겁에 질린 피식자로 그려졌던 여성상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No는 No를 의미한다’고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영화 밖 여성들 말이다. 그러나 애비게일은 오직 자신의 쾌락과 권력을 위해서만 자발적으로 몸을 사용한다. 애비게일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가장 낮은 신분을 가졌음에도 스스로 몸의 주권을 가졌다는 점은,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라는 문구가 얼마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사실인지를 방증한다.
사라는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거부하고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는 '남성의 활동'이라 여겨지는 사격과 승마는 물론, 정치와 행정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귀족 남성들이 우스꽝스러운 가발과 화장으로 공작새처럼 자신을 뽐내기에 여념이 없는 동안, 사라는 있는 그대로 햇볕에 살짝 그을린 얼굴을 하고서 국정을 움직인다. 물론 사라는 언제든 스스로 꾸밀 수 있다. 그는 때에 따라 긴 머리를 질끈 틀어 올렸다가도 풍성하게 늘어뜨리고, 화려한 드레스와 활동적인 바지를 용도에 맞춰 골라 입는다.
얼굴에 남은 흉터는 사라의 당당함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한다. 사라는 애비게일의 계략에 휘말려 뺨에 큰 상처를 입고 앤은 질겁하며 그를 밀어낸다. 그러나 사라는 "내가 남자였다면 영광스러웠을 것"이라며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가 거울 앞에서 좌절하며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는 일은 없다. 사라가 흉터를 가리기 위해 착용하는 레이스는 결점을 숨기는 장치가 아니라, 겁에 질린 앤을 위한 배려 또는 애정에 가깝다. 사라는 앤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일 뿐이다. 그는 여성스러움이나 여성의 덕목 따위로 강요되는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행한다.
최고 권좌에 앉은 앤의 몸은 영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모든 관계는 앤의 몸으로부터 시작된다. 앤은 말을 타다 떨어져 몸을 꼼짝할 수 없었을 때 처음 만난 사라와 사랑에 빠졌고, 애비게일은 앤의 다리에 약초를 발라 통증을 완화시킨 뒤 사라의 호감을 얻는다. "다리 좀 주물러"라는 앤의 명령은 몸과 마음을 함께 사랑해달라는 애원에 가깝다. 옥시토신, 프로락틴 등 출산 시 여성의 몸에서 생성되는 신경안정호르몬은 클리토리스를 자극해 오르가슴을 느낄 때에도 분비된다. 유산과 사산을 겪으며 자식 17명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가 다산과 번식을 상징하는 토끼 17마리에 각각 자식들의 이름을 붙여 기르고, 고통을 잊기 위해 매일 밤 여성들을 침실로 들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앤은 언제나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말과 치마 안으로 들어가 닿는 손길을 필요로 하고, 몸에 흐르는 권력의 피를 이용해 언제든 쟁취하고야 만다.
통풍, 당뇨, 섭식장애 등 각종 질병으로 쇠약해진 앤의 신체는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궁전이자 권력 구조다. 달콤한 케이크를 삼키지만 이를 소화하지 못해 게워내고 또 입에 욱여넣기를 반복하 듯, 앤이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쾌락은 결국 그녀를 무한한 고통에 빠지도록 한다. 체계 안에서 위로 올라가려 발버둥 치는 모두가 앤과 마찬가지다. 권력을 좇는 영화 속 인물들은 악취 나는 진흙에서 뒹굴고 바닥에 끌려 다니다가 독한 술에 절여진다. 이를 데 없이 망가진 육신은 안에 담긴 것들을 좀먹는다. 혼미해진 영혼은 다시 몸을 병들게 한다. 그렇게 병든 개개인은 안에서부터 곪고 썩어 문드러진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악순환은 체계의 꼭짓점에 선 앤이 지닌 권력인 동시에 앤의 몸이 영화 전반에 행사하고 있는 힘이다. 그야말로 '여왕의 것'이다.
분초 단위로 여배우의 노출과 섹스 장면을 관음하는 이들은 '더 페이보릿'에서 절대 원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애비게일이 도박빚에 팔려가 여러 남성들에게 겁탈당하고, 배불뚝이 남편에게 '여자는 생리를 28일씩 한다'고 둘러대며 성관계를 거부했던 과거는 모두 그녀의 입을 통한 대사로 흘러간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지만 두 여성의 섹스 장면은 볼 수 없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여성들이 나누는 밀어와 그들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표정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림 같은 아름다움('아가씨')이나 지독한 처절함('가장 따뜻한 색 블루')을 카메라 앞에 '전시'했던 몇몇 영화들과 달리, '더 페이버릿'은 '시선', 즉 대상화할 수 있는 권력을 절대 관객에게 쥐어주지 않는다. "어디 감히 나를 똑바로 쳐다보느냐!" 앤의 불호령처럼, 자기 몸의 권력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