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프로이트가 거기에?
영화 <싱 스트리트>(201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싱 스트리트>는 <원스>, <비긴 어게인>으로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존 카니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는 1980년대 아일랜드 사회의 모습과 과거의 자신을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소년 코너의 모습에 투영한다. 이 영화는 코너가 사랑과 꿈을 찾는 성장기다.
그런데 ‘누가 봐도 주인공’이 아닌 소년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코너가 학교에서 멋지게 공연해냈을 때도, 비바람을 헤치며 국경을 넘을 때도, 내내 코너의 형 브렌든(젝 레이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브렌든은 코너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듬직한 형이자 음악 스승이다. 코너는 에이먼 앞에서 듀란듀란을 평가하며 브렌든이 했던 말들을 그대로 읊기도 한다. 그저 남의 것을 베낄 줄만 알았던 애송이가 제법 근사한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난 데에는 브렌든의 공이 크다. 코너는 형이 숙제로 건넨 LP를 공부하고, 각 뮤지션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 색깔은 물론 옷차림까지 매번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문제는 브렌든이 코너의 조력자에만 머무른다는 것이다. 브렌든은 망설이는 코너에게 "노력이면 그만이야! 섹스 피스톨즈는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냐?”고 일침 했지만 정작 자신은 악기를 놓은 지 오래다. 그가 꿈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저 깊은 음악적 조예와 기타에 대한 애정을 보아 한때 뮤지션을 꿈꿨겠거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코너는 해냈지만 브렌든은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서는 브렌든의 방에 있다. 각종 앨범과 포스터로 가득한 공간은 코너가 조언을 얻고자 찾아가는 현자의 방인 동시에 아이들의 현실 도피처다. 그 가운데에, 마주 앉은 브렌든과 코너 사이에, (섹스 피스톨즈도 아니고 블레이즈도 아닌 무려) 프로이트가 근엄한 표정으로 관객을 응시한다. 록밴드만큼 유명한 이 정신분석학자는 브렌든의 물리적·의식적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이를 통해 프로이트의 이론, 즉 '아버지'의 영향 아래 있는 브렌든의 한계를 명시한다.
프로이트는 1896년 부친상을 당한 후 실제적 아버지에서 나아가 상징적 아버지의 역할을 이론화했다. 그에 따르면, 원시시대 아버지를 죽인 아들은 무질서한 세상에서 죽은 아버지를 숭배하고 살해에 대한 죄의식을 품는다. 내면화된 죄의식은 충동과 쾌락을 누르고 사회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 ‘초자아(super-ego)’다. 라캉은 이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개념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동일 선상에 놓기도 했다. ‘자아(ego)’는 초자아의 감시를 받으며 ‘이드(id)’를 억압한다. 요컨대 아버지는 아들의 욕망을 제어하고 '사회적으로' 살아가도록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금기를 만들어내는 법과 규칙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며 사회적인 기준이지만, 동시에 꿈을 좇기는커녕 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억압적 권력으로 작용한다. 영화 속 ‘아버지(Father)’로 다시 돌아가서, 브렌든의 아버지는 거실 탁자에서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공부하는 딸을 대견히 여기는 사람이다. 음악쇼를 볼 시간이라고 아이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으는 어머니와는 정반대. 브렌든이 내면화한 사회적 기준은 그의 아버지로 인한 것이다. 현실에 순응하길 바라시니 따를 수밖에.
브렌든은 음악을 위해 대학을 중퇴하는 강수를 뒀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늘은 학교만큼 쉽게 뛰쳐나올 수 없었다. 아버지는 스페인으로 떠나려던 브렌든을 막아섰고, 이후 그는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 다시 기타를 연주하진 않지만 학교에 돌아가지도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탈이다. 때때로 집 앞 계단에서 햇볕을 쬐며 미련을 곱씹을 뿐이다. 스페인의 태양을 갈망했지만 떠날 수 없었던 어머니처럼. 그는 아버지에게 묶인 어머니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자신을 동일시한다. 독립하겠다는 어머니를 향한 브렌든의 분노는 배신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에게서 어머니를 놓아주지도, 아버지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하는 오이디푸스의 상이 비친다.
또 다른 '아들' 코너가 제2의 브렌든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격동의 시기가 찾아온 덕이다. 경제 공황 탓에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아버지의 권력은 경제력 상실과 함께 붕괴한다. 더블린의 젊은이들은 새 인생을 찾아 런던으로 떠나고, 기존의 가족 구성원은 뿔뿔이 흩어진다. 기성 체제의 위기는 변화의 시발점이 되어 사회 전체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아버지는 힘을 잃었다. 가부장적 체계, 이혼 금지 따위의 보수적인 법 조항, 엄격한 규율과 통제 등 사회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브렌든이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코너의 세상에서 아버지는 부재하다. ‘싱 스트리트’ 멤버들의 아버지는 제각기 다른 이유(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거나, 세상을 떠났거나 등)로 보이지 않는다. 코너를 괴롭히던 배리 또한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비행을 멈추고 밴드의 일원이 된다. 또 다른 아버지(신부, Father) 역시 권력을 상실한다. 벡스터 신부는 ‘남자다워야 한다’는교칙에 따라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획일화를 강요했지만, 코너는 벡스터를 위한 헌정곡 ‘갈색 신발’을 통해 부당한 권력을 풍자하고 통쾌한 자유를 만끽한다. 검은색이 아닌 신발, 알록달록한 화장과 염색은 아버지의 규칙에선 용납될 수 없는 개성이자 욕망의 실현이다.
모두가 코너처럼 현실의 조건과 제약을 뒤엎고서 이상을 향해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자아를 억압하는 아버지는 모순적으로 자아를 구성하는 일부분이기도 해서 당장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떠나는 일은 쉽지 않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불안해하고 아버지의 잔재를 주워 담으며 핑계 삼는다. 브렌든은 그렇게 남아있는, ‘미래파’가 되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들을 대변한다. 어쩐지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더라니. 그를 보며 좌절하긴 이르다. 코너를 보내는 그의 마지막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니까. 브렌든의 환희 섞인 외침은 그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곧 그늘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랩소디의 도입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