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Feb 12. 2020

정유미가 이루는 바람

ize 소속 당시 내보냈던 기사를 아카이빙 차원에서 모아둡니다. / 사진 출처: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2019년 11월 6일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포스터 속 정유미는 어딘가 텅 빈 표정을 하고 있다. 지영이 된 그는 옅게 미소 지으며 오른편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 대현(공유)과 왼편의 관객 중 누구도 마주하지 않는 방향을 비스듬히 응시한다. 그의 어깨 위에 적힌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당신과 나의 이야기’라는 문구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정유미는 어느새 아무도 몰랐던 지영이 되어 ‘당신과 나’를 말한다.



극 중 지영은 명절에 딸이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운 어머니, 아들 둘을 대학에 보내느라 딸에게 일만 시킨 것이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 외할머니, 출산 중 세상을 떠난 선배 등 때에 따라 다른 여성이 된다. 분장이나 특수 효과가 전무한 상황에서, 지영의 시간들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는 장치는 주변 공기를 미세하게 바꿔놓는 정유미의 연기다. 그는 표정이나 목소리를 두드러지게 변조하지 않는다. 대신 보다 선명해진 눈빛, 미묘하게 달리 사용하는 얼굴 근육 등 아주 작은 단위로 세밀한 변화를 보여준다. ‘혼이 나간 듯’ 무표정하게 고된 가사노동과 육아를 반복하는 지영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순간이다. 김미경, 예수정 등 각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대한 흉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지영이 엄마가 되고 외할머니가 된 듯하다. 이로써 정유미는 자칫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성대모사처럼 묘사될 수 있는 광경을 자연스러운 영화 속 현실로서 전달한다.



정유미가 변화시키는 공기는 영화 너머 현실에도 흘러든다. “이건 나여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스타뉴스’)” ‘82년생 김지영’의 출연을 결심한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 정유미는 늘 ‘해야 하는’ 이야기를 택했다. ‘더 테이블’의 유진은 옛 연인 창석과 재회하지만, 창석은 유명 배우가 된 그에게 ‘지라시가 진짜냐’ 묻고 줄곧 떠벌려온 과거를 증명하기 위해 직장 동료를 불러 모은다. 유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설렘과 기대는 차갑게 식어 여성 또는 유명인에 관한 소문을 퍼트리고 대상화하는 사람들을 향한 실망과 환멸이 된다. ‘염력’의 홍상무는 대기업 임원으로 갖은 악행을 일삼지만,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이기도록 태어나’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단숨에 처연해진 분위기는 홍상무가 능력보다는 외모를, 도덕보다는 성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배우이자 여성이며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정유미가 ‘82년생 김지영’의 지영이 된 것은 필연에 가까워 보인다.



“나에겐 정말 단순한 상태가 돼서 최대한 나를 비우고 연기하는 것밖에 없다(‘씨네21’)”라는 말처럼, 그는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의 마음’이 곧 ‘진심’이라 믿으며, 배우로서의 자신을 비우고 이러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다른 한편으로 누가 될 것인가, 나아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 또한 그 자신이다. 배우 정유미는 그렇게 자신을 비우거나 채우며 세상에 하고픈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그가 조금씩 만들어낸 주변의 공기는 바람이 된다. “이미 배를 탔고, 배는 출발했고, 우리는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다.(‘아주경제’)” 범람하는 비하와 왜곡을 뒤로한 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스스로 불어온 순풍을 타고서, 정유미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자 “김지영처럼 차츰 용기를 내며 앞으로 나가는 일”만을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82년생 김지영>, 불온하지 않은 얼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