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e 소속 당시 내보냈던 기사를 아카이빙 차원에서 모아둡니다.
2019년 10월 29일
*‘82년생 김지영’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원작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얼굴들을 보여준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서 육아를 전담하는 82년생 지영(정유미)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다른 사람의 언행을 모사하고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인다. 지영은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또 개고, 잠시 넋을 놓은 듯 앉아 있다가, 아이가 어지럽힌 방을 치우고 다시 놀아주기 위해 장난감들을 펼쳐놓기를 반복한다. 영화는 이러한 지영의 지루하고 소모적인 노동을 가만히 응시한다. 눈앞에서 되풀이되는 광경들은 단조롭지만 결코 쉽게 흘러가지 않는 지영의 시간이며 가사노동과 육아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는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현실의 삶이다. 한정적으로 반복되는 장면은 지영이 느끼는 ‘갇힌’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케 한다.
그러나 영화는 지영의 상황을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는다. 감정이 격해지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얼굴을 화면 가득 채우기보다 가슴께에 걸쳐 혹은 더 멀리서 인물을 바라본다. 지영에서 주변 인물들로 시선이 옮겨가도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거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화법은 남편 대현(공유)의 시선으로 지영을 바라볼 때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대현은 지영의 ‘이상함’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이를 해결할 방도를 살피지만 정작 지영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자나 깨나 아내 걱정뿐인 대현은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지영에게 꼭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고된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지영이 자신과 대화하면서 크고 작은 반찬통을 냉장고에 넣느라 두 손에 턱까지 사용하거나, 세탁 후 갠 옷들을 한 번에 옮기기엔 양이 너무 많아서 거실과 안방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때 지영과 대현을 교차적으로 같은 거리에서 지켜봐 왔던 관객과 자신이 퇴근한 후의 지영만을 알고 있는 대현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대현은 결코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아내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회적으로 ‘좋은 남편’이다. 그런 그가 관객의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영화는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의식의 범위를 구축하는 사회구조를 가리킨다.
대현 이외 남성들을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다.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졌다며 성윤리 교육 같은 걸 왜 받아야 하느냐고 투덜거리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세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대응을 고민하는 남성도 있다. 대현의 오른쪽에는 ‘시대의 변화가 불편한’ 동료가, 왼쪽에는 ‘변화를 맞닥뜨리고 고민에 빠진’ 동료가 서 있다. 그들은 육아휴직을 고려하면서도 인사에 불이익을 주는 조직과 성별 임금 차로 인한 실질적인 소득 감소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고 말한다. 다시 구조의 문제다. 취업이 되지 않아 속상한 지영에게 ”그럴 거면 시집이나 가“라고 고함쳤던 아버지 영수(이얼)는 지영이 합격 전화를 받자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한의원을 개원한 친구를 위해 한약을 팔아주면서도 딸들 것은 생각조차 못 했던 그는 아내의 절규를 들은 그날 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약을 더 짓겠다고 말한다. 지영의 남동생 지석(김성철)은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만년필을 선물한 과거를 지울 수는 없지만, 오롯이 지영의 것인 만년필을 건네면서 공감과 이해를 시도한다. 영화는 때때로 기계적으로 느껴질 만큼 직관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양면을 번갈아 비춘다. 궁극적인 목적은 특정 성별의 개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 해결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반복적이고 친절한 설명이다. 세련되지 않은 플롯이나 작품의 완성도는 아쉽지만, 이것이 일정 부분에서는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쳐다보는 일’을 막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이 힘들었겠다.” ‘본인만 빼고 다 알았던’ 자신의 증상을 알게 된 지영은 대현에게 화를 내거나 왜 이제껏 숨겼냐고 원망하지 않는다. 그의 첫마디는 아내가 만삭일 때에도 명절에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던 대현이 올해는 좀 쉬자고 말하기까지, 직장 내 시선을 무릅쓰고 육아휴직을 결심하기까지, 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죄책감을 갖기까지의 ‘힘듦’을 위로하는 말이다. 지영은 아이처럼 우는 대현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한다. 타인이 되어 말하고 행동했던 지영이 스스로 아픔을 돌아보고 자신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건 그때부터다. 소설이 남성의 시점으로 지영의 생애를 ‘낯설게’ 돌아보고 변하지 않는 사회를 절망적으로 강조했다면, 영화는 성별 무관 각각이 가진 다면성을 조명하며 화합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러한 특징은 두 매체의 같은 장면 다른 설정을 비교했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지영에게 계속해서 지시를 내리다가 언쟁이 붙는 사람은 시아버지가 아니라 시어머니가 됐다. 커피를 마시는 지영을 보며 팔자 좋다고 수군거리는 일행도 ‘남자들’에서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으로 바뀌었다. ‘첫 손님이 여자면 재수가 없다’는 속설을 믿는 소설 속 택시 기사와 달리, 영화 속 상점 주인은 자신이 첫 손님인 걸 우려하는 여성에게 “그런 게 어디 있느냐. 우리 가게 손님은 다 어머님들이다”라고 말한다. 한편 여성들의 고충을 이해한다면서도 다음에 여직원을 뽑을 때는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는 정신과 전문의 역시 남성이었으나, 지영을 지지하고 따뜻한 눈빛을 보내는 여성으로 변경됐다. 영화는 여성이 여성혐오의 피해자인 동시에 경우에 따라 이를 재생산하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서로 연대하며 미래를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중심 서사는 반드시 모두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편견을 강화하거나 결말 이후 필요한 변화에 대한 논의를 저해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희망적으로 막을 내린다. “김지영 씨는 1982년 4월 1일,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키 50센티미터, 몸무게 2.9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영화의 끝에서 지영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문장들은 그가 쓰고 있는 글의 내용이자 소설에서 김지영의 출생을 묘사하는 구절이다. 소설은 영화가 됐고, 118분 동안 ‘82년생 김지영’ 자체를 부정하고 납득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적절한 타협점과 개연성을 제공한 영화는 소기의 목적을 이뤘다는 듯 다시 소설이 된다. 이러한 영화의 방향은 소설 발간 이후 촉발된 논쟁의 반영이기도 하다. 소설이 다루는 사회적 부조리, 즉 할머니는 손자만 예뻐하고 선생님은 ‘남자애는 원래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힌다’고 편들며 화장실에는 불법 촬영 카메라가 설치된 세상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체감하지 못한 이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피해 의식’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에 소설은 문학적 측면과 별개로, ‘현실의 탈’을 썼다고 ‘요즘 세대는 겪지 않는’ 차별을 다룬다고 비판받았다. 비만 여성을 향한 혐오 발언에서 기인한 멸칭 ‘82kg 김지영’으로 불렸고, 책을 읽었다고 알려진 아이린, 최수영, 서지혜 등 여성 연예인에게는 악플이 쏟아졌다. 페미니스트가 즐겨 읽는 책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설 이후의 일들을 목격한 영화는 매체의 특성을 이용해 경험을 공유할 기회를 마련했고 극장의 모두를 끌어안는 전략을 택했다. 네이버에서 ‘82년생 김지영’에 ‘네티즌 평점’은 남자 평균 2.16점, 여자 평균 9.50점으로 종합 6.01점이지만, ‘관람객 평점’은 남자 평균 9.49점, 여자 평균 9.65점으로 종합 9.60점(10월 27일 기준)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전자는 네이버 회원이라면 누구나, 후자는 네이버를 통해 영화를 예매한 고객만 점수를 매길 수 있다. 실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CGV 골든에그지수가 97%인 것을 고려하면, 영화를 본 관객 대다수는 성별과 상관없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영화를 통해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체험은 나 또는 너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된다. 남은 건 소설과 영화를 읽지도 보지도 않고서 최저점으로 ‘공격’하는, ‘82년생 김지영’의 존재 자체를 불온(不穩)하게 여겨 불태우려 하는 일부 세력이다. 포털사이트에서 자행되는 악의적인 폄훼가 이를 방증한다. 네이버 영화는 이용자들이 직접 영화의 명대사를 입력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82년생 김지영’은 "하루 종일 티비 보다가 애 데리러 가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빼애애액거리며"라는 게시물이 7600여 명의 추천을 받으며 1위에 올랐다. "기분 다운됐어. -집값 반 좀 내달라고 하니까", "아몰랑! -여자들의 필살기“ 등이 뒤를 이었다. 영화에 없는 대사인 건 물론이고 여성을 비이성적이고 히스테릭한 존재로 묘사하며 육아와 가사노동을 '놀고먹는 것'으로 폄하하는 발언들이 수천 명의 지지를 받는다. 당장 영화 속 편견과 차별이 실현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62년생은 몰라도 82년생은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82년생 김지영’ 캐스팅 직후 악성댓글 폭격의 표적이 된 정유미는 이에 대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거 하나만 보고 달려왔다. 거창한 메시지도 아니고 그냥 나와 내 주변 이야기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한다(‘스포츠한국’)”라고 말했다. “저에 대해 뭘 아세요? 여기서 10분 정도 본 걸로 사람 판단하세요? 제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라는 지영의 대사가 스크린 너머의 사람들을 향하는 까닭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정유미의 말처럼 명백히 존재하는 ‘나’와 ‘주변’ 모두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사람을 만났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며 손을 내민다. 이는 남성 중심 서사의 극영화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요컨대, 친절하고 온화한 얼굴을 한 영화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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