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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Apr 27. 2021

40. 생활체육 in 시카고


봄이 되자 내가 사는 Wheaton시 Park District (우리로 따지자면 공원 부서)에서 메일이 왔다. 봄 시즌 스포츠 리그를 오픈한다는 내용이었다. 축구, 야구, 농구, 미식축구, 소프트볼, 라크로스 등 종목도 다양했다. 준서에게 물어보니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알아보니 매주 주중 연습 1회, 주말 경기 1회가 총 8주 동안 이루어지는 꽤 긴 리그였다. 가격이 비쌀 것 같았지만 총 70불(8만원 정도)로 생각보다 저렴하였다. 과연 이 돈으로 인건비나 나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원래 연예인 걱정과 미국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참았다. 


축구반 가입은 인터넷을 통해 진행되었다. 열심히 작성하는데 항목 중 코치 지원란이 눈에 들어왔다. 웬 코치 인가 싶어 읽어보니 부모 중 한 명의 코치 지원이 의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헤드코치 또는 어시스턴트 코치 중 선택하라고 했다. 말도 어버버 하는 외국인이 헤드는 무슨 하면서, 옆에서 다른 아빠들과 공이나 같이 주워주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어시스턴트 코치를 원한다고 적었다.


그렇게 등록 이후 2주 정도 지났고, 어느 날 공원 부서 담당자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나는 리그 시작 안내 메일 보냈나 보다,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님께’가 아닌 ‘코치에게’로 시작하는 그 편지를 나는 읽지 말았어야 했다. 내용은 이렇다.


코치에게,

코치 지원해줘서 고마워. 넌 Indiana팀의 헤드코치가 되었어. 연습에 필요한 공과 구급약품 등을 줄 테니 이번 주 금요일에 사무실에 방문해줬으면 해. 14명으로 구성된 팀 명단과 부모님 이메일, 전화번호를 첨부했으니 훈련과 시합 등에 관련된 사항은 네가 직접 부모들에게 안내해주길 바래. 연습은 1주일에 한 번 모여서 너 주도하에 자율적으로 실시하면 되고, 시합은 매주 토요일에 하는데 네가 심판 봐야 해. 행운을 빌어.

데럴 보냄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다. 내 한국 이름만 봐도 얘한테 헤드코치를 맡기는 건 Wheaton시 공원 부서 개국 이래 가장 큰 정책적 오점이 되리라는 건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인데, 이 엄청난 일을 데럴이 해낸 것이다. 네이티브도 아닌 사람에게 연락에 연습에 심판이라니. 갑작스러운 통보에 없던 불면증도 생길 것 같았다. 난 즉시 데럴에게 답장을 썼다. 괄호는 속마음이다.


데럴에게,

너 편지 잘 받았어. (받았지만 납득은 안돼)

난 어시스턴트 코치를 지원했는데 헤드코치가 되었더라. (공무원이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니)

내 이름 보면 알겠지만 난 네이티브도 아니고 영어도 배우는 중이야. (일상생활도 겨우 한다 얘)

애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주면 좋을 것 같아. (좋은 말로 할 때)

A 보냄


1시간 후 그에게서 답이 왔다.


A에게,

너희 팀에서 코치를 지원한 사람이 네가 다야. 어시스턴트 코치로 되어 있는 토니가 널 도와줄 거야, 물론 매주 참석은 좀 어렵다고 해. 토니가 헤드코치를 하면 좋겠지만 일 때문에 어렵다고 해서 대안이 없어. 알다시피 우리는 코치가 너무 부족해. 토니가 최대한 도와준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 마.

데럴 보냄


아, 코치 자원봉사가 의무라고 쓰여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코치가 힘든 것을 알아서인지 아무도 신청을 안 했던 것이었다. (준서 친구 아빠들 하나도 안함) 나도 안 했으면 되는데 처음이라 잘 모르고 의무라 하여 신청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는데 나까지 안 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암튼 그렇게 난 Indiana팀 헤드코치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안 한 무보수 명예직이라니.


하지만 아들이 참여하는 축구팀에 코치를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래서 13명 부모들에게 안내 메일도 보내고 연습 준비도 착실히 시작했다. 일단 인터넷으로 만 5세 축구 연습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동영상을 보면서 말과 동작을 하나하나 준비했다. 하지만 꼬맹이들이 이걸 이해할지, 내 말을 알아들을지, 그리고 잘 따라 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기나긴 불면의 밤이었다. 차라리 학교 숙제하고 시험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첫 연습날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혹시 토니가 안 오면 어쩌지, 안오면 나 혼자 아이들과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봐야지 다짐하며 일찌감치 그라운드에 나가 아이들을 기다렸다. 4시 50분부터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일단 하이 에브리원 하고 아이들을 가운데로 모이게 했다.


엄엄.. 렛 미....


하는 찰나에 구세주 토니가 왔다. 세상에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토니는 한 손에 전자 호루라기를 쥐고 온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머쓱해 하던 나와 달리,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바로 연습에 돌입했다. 그리고 능수능란하게 아이들을 이끌었다. 그의 호령에 아이들은 나무 돌고 선착순 달려오기를 수 차례 반복했고 드리블과 패스 연습도 원만하게 진행하였다. Wheaton시에 히딩크가 살고 있었다. 


주말에는 1시간 동안 다른 팀과 시합을 했다. 경기는 보통 토요일 오후 1시 전후로 이루어졌고 팀당 2경기가 동시에 진행되어 모든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경기를 뛸 수 있었다. 2경기의 심판은 각 팀 코치들이 보고 시간, 교체 등 룰은 사전에 코치들이 모여서 정하였다. 공원 부서 개입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한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경기는 상당히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었고, 경기 내내 캠핑의자 혹은 돗자리에 둘러앉은 부모, 형제, 조부모 등은 아이들을 신나게 응원하였다. “Go get it”과 “Kick in”이 난무하였고, 골이 터질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쳐주며 아이들과 팀을 응원해주었다. 


이런 응원 속에서 아이들도 열심히 뛰었다. 준서 역시 그랬다. 다만 준서는 공과 상관없이(?) 열심히 뛰는 경향이 있어서 금방 지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자기 플레이에는 만족하고 있었다. 박지성처럼 공간 창출력이 뛰어난데 다른 아이들이 패스를 못 찔러준다 정도로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 준서를 아내는 열성적으로 응원해준다. 미국이기에 “준서 겟 잇” “준서 드리블” 등 영어 응원을 하는데, 급박한 상황에서는 종종 한국말이 방언처럼 터진다. “준서 뺏어” “달려” “공 차” 등이다. 준서 친구 엄마들이 그 순간에 빵 터진다. 역시 급할 땐 모국어다.


경기 외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경기를 보러 꽤 많이 온다는 점이다. 주말에 잠시 시간을 내어 손주들 경기를 보러온다는 것, 돈으로도 만들 수 없는 추억이라는 가치들을 저들은 오랜 기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경기 끝나자마자 쿨하게 헤어져서 각자 집에 간다. 참 미국답다.


행정적으로 보자면 공원 부서는 처음에 팀 매칭 해주고 경기장 세팅만 해줄 뿐 연습, 시합 등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축구 담당자 1명이 킨더 4개 팀 포함 각 학년별 수십개 팀으로 이루어진 모든 리그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부모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 훌륭한 축구리그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꽤 오랜 시간 세대를 이어온 경험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준서 미국친구들 형제자매 기준으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축구, 야구 주말리그는 유치원 때부터 하다가 좀 크면 소프트볼도 하고 라크로스도 한다고 했다. 그것도 매주 연습과 시합을 모두 해보는 것이다. 부모와 같이 여러 스포츠를 연습하고 시합하던 경험을 가진 아이들이 성인이 된다면 자신과 아이들의 스포츠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 토니의 아들이 크면 본인 아들의 축구리그 코치를 당연히 하지 않을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한국의 생활체육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생활체육에 과연 아이가 들어갈 자리가 있었나, 아이들이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할 기회를 정부와 어른들은 충분히 제공해주었나, 아님 아이들의 체육활동을 모조리 사적인 영역에 떠넘기지는 않았나 등등의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준서에게 축구를 가르친다고 생각했다면 차범근 축구교실에 보내 훌륭한 선수 출신 코치 밑에서 체계적으로 배웠을 수는 있겠지만, 동네 아저씨가 코치인 팀에서 아빠와 함께 뛰어놀고 즐기는 축구는 아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아이들 중심으로 생활체육을 재설계한다면 가족 모두가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에게도 작은 생각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ps. 근데 잘 생각해보면 70불도 많이 받는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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