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소리에 번쩍 눈이 떠진다. 창 밖은 이미 대낮처럼 밝다. 아침이다.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온다.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민서다.
“아빠, 아빠”
세상에 나와 처음 배운 말이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말이기도 하다. 아빠. 물론 여기저기다가 다 아빠아빠 하는 걸 보면 특별히 나를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눈 마주치면서 아빠, 아빠, 해주면 기분이 참 좋다.
시카고 아침 일상은 특별할 게 없다.
아침마다 아내는 준서 점심 도시락 준비로 바쁘다. 한국이면 된장국에 김치도 싸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다. 최대한 한국 냄새 덜 나는, 그래서 튀기 싫어하는 준서를 덜 돋보이게 만드는 무난한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첫날 도시락은 김밥이었고, 그 다음 날도 김밥이었다. 영화 올드보이도 아니고 매일 김밥만 찾는 아들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평소 15년 동안 김밥만 먹어도 크게 불만이 없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 나를 생각해보면 그냥 유전자의 힘 같기도 하다. 근데 난 진심이다.
도시락이 다 준비되면 아침을 먹이고 등교를 시켜야 한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거리, 9시 30분 등교에 맞춰 9시 20분 즈음 아내가 준서를 데리고 길을 나선다. 그러면 아내가 오기까지 20여분은 온전히 나와 민서만의 시간이다. 그럼 나는 민서를 아기 의자에 앉히고 TV를 켠다. 한국 예능이 나오는 온디맨드코리아 채널을 선택해서 토스트 한쪽과 함께 시청한다. 이 채널은 공짜로 한국 예능과 드라마, 뉴스 등을 볼 수 있는 채널이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한 공짜는 없다. 10분마다 중간광고 8개씩을 시청해야 한다. 만약 중간광고가 9개였으면 안 봤을 테지만 8개라 참고 보는 편이다. 사장이 누구인지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와 달리 민서는 본 내용보다 광고를 더 좋아한다. 특히 아기가 나오거나 흥겨운 음악이 나오는 광고를 좋아하는데, 그런 광고가 중간중간 무려 8개씩이나 나오니 민서는 아빠와 함께 TV 보는 것을 좋아하는 눈치다. 케미가 잘 맞는 부녀 사이다.
하지만 그런 민서도 15분 정도 시청하면 아기 의자에서 꺼내 달라고 떼를 쓴다. 그러면 나는 민서를 꺼내 품에 안은 채 계속 TV를 본다. 5분 후 아내가 도착한다. 그러면 나는 민서를 아내에게 넘기고 계속 TV를 본다. 난 TV가 좋다. 그러다 좀 있으면 온라인 수업시간이 된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재로 들어간다.
여기까지가 준서의 등교를 겸한 평범한 아침 일상이다.
보통은 이렇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내가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금요일마다 코로나 검사를 위해 학교에 간다. 작년 11월 13일부터 방학 제외한 매주 금요일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코로나 검사를 해왔다. 그리고 오늘이 딱 스무 번째 되는 날이었다. 스무 번째라고 간호사가 특별히 면봉을 더 깊게 코에 집어넣어 검사를 해주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이름이 귀로나 바이러스였으면 귀로 검사를 했을까, 그러면 좀 덜 아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든다.
암튼 오늘은 서재로 가는 대신 차에 타서 시동을 걸었다. 학교 가는 길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56km, 약 50분 거리를 거의 직선도로로 달리면 된다. 방향 전환은 좌회전 1번, 우회전 2번이면 끝이다. 처음 몇 번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갔었는데 크게 의미가 없었다. 좌우우. 이제는 그냥 라디오 들으면서 간다. 라디오는 104.3 Mhz Jam 노래 채널과 105.9 Mhz WBBM 뉴스 채널을 주로 청취한다. 출발할 때는 뉴스를 듣다가 뉴스가 얼추 반복되면 노래를 듣는 식이다.
자동차 출발과 동시에 105.9를 누른다. 시작은 늘 트래픽 앤 웨더다. 90번 고속도로에 사고가 있었고, 레이크쇼어 드라이브에서 다운타운 들어가는 방향에는 약간의 정체가 있다고 한다. 날씨는 오늘도 추운데 주말에는 더 추워질 거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은 경제인데, 다우지수가 현재 120 포인트 상승하고 있고 내스댁은 12 포인트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 뉴스로는, 어제 인디애나폴리스 페덱스 건물에서 총기사고로 8명이 사망했고, 시카고에서는 13살 소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연방하원 청문회에서 앤서니 파우치 미 전염병 연구소장은 6개월 후에 코로나 백신 효능 강화를 위해 부스터 샷을 한 차례 더 맞을 필요가 있다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좀 듣다보면 뉴스가 슬슬 지겨워진다. 노래 채널로 옮길 순간이다. 즐겨 듣는 Jam 노래 채널을 터치한다. 이 채널은 주로 흥겨운 음악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90년대, 2000년대 추억의 팝송도 꽤 자주 나온다. 오늘의 시작은 Mariah Carey의 Emotions 이다. 신나는 멜로디에 시원한 가창력이 압권인 노래다. 이어 Justin Timberlake의 Sexy Back도 나오고 2Pac의 Changes, The Weeknd의 Blinding Lights도 나온다. 차 안에서 흥이란 것이 폭발한다. 여기에 Ne-Yo의 So Sick과 Britney Spears의 Toxic 까지 나오면 내가 시카고에 있는 건지 싸이월드 파도를 타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노래 사이사이 중간 광고도 나온다. 보험 광고, 햄버거 광고, 병원 광고 등이 보통인데 오늘은 느닷없이 변호사 광고가 나왔다. 이혼 팁을 알려준다고 한다. 첫 번째, 집에서 절대 나가지 말라. 네 집이다. 두 번째, 아내 SNS를 잘 살펴봐라. 꺼리를 찾아라. 세 번째, 변호사 꼭 구해라. 그게 바로 나다. 대낮에 이런 광고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내용이 참 신기했다. 이 정도면 흥신소 광고라고 해도 믿을 듯 하다.
이래저래 뉴스 듣고, 노래 듣고, 흥신소 광고까지 듣다 보면 어느새 학교에 도착한다. 학교 표지석을 지나면 새파란 봄 하늘 아래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예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미드웨이 플레이슨스 어귀에 차를 세운다. 봄날에 학교는 참 예쁘구나.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