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새 식구가 생겼다. 바로 토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언젠가부터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지지난주, 우리는 준서 봄방학을 기해 뉴욕을 다녀왔다. 5박 6일의 일정이었다. 뉴욕은 10년 전 출장으로 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타임스퀘어를 걸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가져다주었다.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물론 아시안 헤이트(Asian Hate) 때문에 걱정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어딜 가나 속 썩이는 문제아 한 둘은 있는 법이니 그런 사건들을 너무 큰 물결로 보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얼추 다 비슷하니.
암튼 달콤한 뉴욕에서의 5박 6일을 뒤로하고 우리는 금요일 오후 집에 도착했다. 오랜 운전 끝에 집에 도착하고 나니 집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서 쉬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문 쪽으로 향하는데 다소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텃밭 한가운데 웬 토끼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그것도 턱 하니 자리 잡고 앉아있었다.
나도 놀랐지만, 토끼는 나보다도 더 놀란 듯했다. 마치 난 원래 여기 살던 사람, 아니 동물인데 댁은 뉘슈 하는 눈빛으로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묘하게 당당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정식 임대차 계약을 맺고 매달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는 건 난데 무단 점거 중인 저 토끼는 왜 저리 당당하지 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슬몃슬몃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정식 세입자와 불법 세입자 간의 신경전이 좀 길어졌다.
이런 와중에 준서가 달려왔다. 동물 사랑이 시튼 못지않은 준서는 나와 토끼 사이의 신경전을 허물고 토끼에게 다가갔다. 무작정 다가오는 준서(a.k.a 절대 권력자)의 등장에 놀란 토끼는 부리나케 일어나 집 앞 나무데크 아래로 들어갔다.
응 그렇지, 넌 너네 집으로 가야지........ 응? 근데 거긴 내 집인데?
기이한 동거의 시작이었다. 토끼와 함께 살게 되다니. 하지만 아직 하나의 가능성, 데크 아래로 도망갔다가 우리가 없어진 사이 다른 곳으로 갔을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그래 설마 데크 아래 살겠어.
그런데 그 날 저녁 준서가 토끼 먹으라고 데크 아래에 놔둔 당근이 다음날 아침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남은 하나의 가능성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토끼는 그곳에 사는 듯 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탄 걸 쟤가 알고 저러는 건가 싶었다. 마을의 유일한 한국인 집에 기생하다니.
하지만 그 이후 또 며칠 눈에 띄지 않아서 사나 안사나 반신반의하기는 했다. 그러다 지난주 화요일 그 토끼가 다시 집 앞 잔디밭에 나와 보란듯이 야생화를 뜯어먹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는데도 코만 벌름벌름할 뿐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이 곳을 자기 집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때 준서가 다급히 나를 찾았다.
아빠 아빠, 저기 봐요 저기!
왜?
한 마리 더 있어요.
뭐가? 응?
그랬다. 데크 옆 텃밭에 한 마리가 더 있었다. 토끼 부부였다. 이것들이 아예 신혼살림을 데크 아래 차린 듯 보였다. 집을 비우지 말았어야 했는데, 뉴욕에 간 사이 아마도 빈 집이라 생각하여 터를 잡은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벌들도 와서 집을 짓고 딱따구리 새들도 집 앞 나무에 집을 짓는 모양인데 이제는 토끼까지 데크 아래 신혼방을 차리고 있었다. 여기가 동물의 왕국인가 싶었다.
이후 토끼 부부는 종종 집 근처에서 우리 눈에 띄었다. 때로는 따로 때로는 같이였지만 둘이 함께 데크 아래 살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그냥 운명이라 생각하고 토끼 부부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같이 행복해야지.
그래도 가끔은 토끼에게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를 전해주기는 한다. 토끼야, 여긴 우리집이야. 그러니 선은 넘지 마.
ps. 동물, 곤충, 새들이 제 집처럼 살고 있는 살기 좋은 우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