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날리 파크 호텔은 작지만 깨끗한 숙소였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무스가 예쁘게 수놓아진 이불이 침대를 감싸고 있었다. 알래스카 다웠다.
다음날 긴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저녁 10시쯤 잠에 들었다. 밖은 여전히 대낮처럼 밝았다. 백야였다. 암막커튼인 이유가 다 있었다.
다음날 아침 8시 20분, 우리는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 길을 떠났다. 오늘 목적지는 앵커리지 동부에 있는 Valdez였다. 알래스카 송유관의 최남단 지점인 이 도시는 드날리에서 차로 8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가는 코스였다. 우리는 빙하와 예쁜 풍경을 보기 위해 이곳을 선택했다.
호텔을 떠나 10분 정도 달렸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이른 아침시간이었고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 낯선 아주머니 목소리였고 드날리 파크 호텔이라고 했다.
"저기, 방에 그레이 색 셔츠가 있던데 본인 건가요?"
"네?"
"옷을 방에 놓고 갔던데 찾으러 올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물건 중에 그레이 셔츠는 없었다. 재차 물었다.
"B동 1호 맞나요?"
"네 맞아요, 안 오실 거면 버릴까요?"
우리 물건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께름칙해서 돌아가기로 했다. 10분을 되돌아가 드날리 파크 호텔에 도착했다. 아내가 로비로 들어갔고 곧바로 그레이 색 옷이 담긴 흰 봉투를 가지고 나왔다. 그럴 리 없는데, 하면서 열어보니 그 안에는 내 그레이 색 반바지가 담겨있었다. 셔츠라매.
호텔로 다시 돌아오느라 왕복 20마일을 손해 보았다. 우리는 그 때 이 20마일 손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미처 알지 못했다. 다시 Valdez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앵커리지 방향으로 한참을 달려가고 있는데 길 옆에 조그마한 주유소가 보였다. 슬쩍 계기판을 보니 70마일(112km) 정도 갈 수 있는 기름이 있었다. 그 때 난 내 실수로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마음이 좀 급해져 있는 상태였다. 좀 더 가서 넣으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20마일 정도 더 갔을 때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주유소는 커녕 인적이 드문 길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계기판에 남은 기름은 50마일 남짓. 설마 남은 50마일 안에 주유소가 없을까?
구글맵으로 경로상 다음 주유소를 검색해보았다. 전방 60마일 후에 주유소가 있었다. 아뿔사, 10마일이 부족했다. 이곳이 주유소가 많지 않은 알래스카임을 깜빡한 것이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낭패였다.
어쩔 수 없이 20분 동안 달려온 20마일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만 했다. 두 번째 회항이었다. 아침에 옷을 호텔에 놓고 오지 않았다면 다음 주유소까지 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20분을 다시 달려 나는 아까 지나친 조그만 주유소에 도착했다. 머릿 속에는 여러 가지 후회가 가득했다. 허름한 주유소에 어울리는 옛날식 주유기계가 놓여있었다. 마음은 급한데 신용카드가 잘 인식되지 않아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갑자기 승인이 되었고 주유에 성공했다.
그렇게 주유를 마치고 유유히 길을 나서는데 갑자기 구글 맵에 50분 가까운 길이 검색되었다. 두 번의 회항이 무척이나 아깝던 차에 지체된 시간을 만회할 수 있는 지름길이 갑자기 검색된 것이다. 나에게는 절호의 찬스처럼 느껴졌다. 별다른 고민 없이 지름길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길은 초입부터 심상치 않았다. 통행하는 차도 없었지만 길도 매우 좁았다. 나는 지름길이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길을 5분 정도 달리니 느닷없이 비포장 도로가 나왔다. 나는 조금 더 달리면 포장도로가 나오겠지 하는 생각에 계속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30분을 달렸다. 오프로드의 덜컹거림이 그대로 몸에 느껴졌다. 기다리는 포장도로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아, 언제까지 이렇게 달려야 하나. 그런데 전화기를 보니 No Service, 신호가 안 잡혔다. 나는 그 순간 여기서 바퀴가 펑크 나거나 차가 멈춘다면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만약 사고가 난다면 전화도 안되니 그저 다른 차가 오기를 기다려 구조를 요청해야만 했다.
나는 세번째 회항, 즉 다시 30분을 되돌아가느냐 계속 진행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서게 되었다. 한참을 아내와 고민하다 일단 그냥 가보기로 결정하였다. 포장도로가 곧 나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더 컸던 것 같다.
그렇게 또 1시간 30분을 더 달렸다. 총 2시간. 나의 모든 시신경은 비포장도로 위 큰 돌을 피하는데 집중해 있었다. 소싯적에 카트라이더를 한 게 이렇게 인생에 큰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부스터만 몇 개 있었어도..
2시간 동안 비포장 도로를 운전하고 나서야 비로소 포장도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멀리 시커먼 아스팔트가 보이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아드레날린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는 현대산업사회에 살고 있었다!
포장도로에 차를 올리니 마치 차가 폭신한 양탄자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정말 행복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포장도로는 현재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었다. 우리는 이후로도 곳곳에서 수많은 도로 공사와 마주쳐야만 했다. 구글맵은 만든 길 뿐만 아니라 현재 만드는 길까지 검색하는 수퍼앱이었다. 고.. 고맙다.
결과적으로 50분 가깝다고 검색된 그 길은 탱크 같은 타이어를 가진 픽업트럭에게만 적합한 길이었고, 타이어 펑크에 주의해야 하는 닛산 로그 렌터카 운전자에게는 피해야 하는 길이었다. Valdez에 도착하고 시간을 보니 오후 6시 20분이었다. 총 운전시간은 예정보다 2시간 늦어진 10시간이었다.
아침에 숙소에 벗어놓고 온 그레이 바지의 나비효과 는 실로 엄청났다. 처음부터 그레이 바지를 호텔에 놓고 나오지 않았다면, 20마일을 손해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주유소에 돌아갈 일도 비포장도로를 걱정하며 달릴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비효과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나는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나비효과의 마지막 비극적 결말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전에 되돌아간 작은 주유소 기계에 내 신용카드를 그대로 꽂아두고 온 것이다. 오 마이 갓.
나는 급하게 카드앱에 접속하여 결제내역을 확인했다. 정말 정말 다행히도 다음 사람이 소량의 기름을 주유하고 꽂힌 내 카드로 결제한 이후 추가 결제 내역이 없었다. 감사하게도 버린 듯했다. 나는 바로 카드를 정지했다.
하루동안 많은 불운들이 겹쳐진, 정말 긴 하루였다.
오늘의 교훈: 호텔에 물건 두고 나오지 말자.
ps.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동안 내 마음은 지옥이었지만 풍경은 천국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