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에 시작한 준서 유치원 과정이 오늘로 마무리되었다. 여름방학 지나고 9월이 되면 이제 1학년에 정식 입학하게 된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했던 것도 아직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학부모라니. 거기에 애 둘 아빠라니. 세월 정말 빠른 것 같다.
32년 전 1989년 3월, 나는 대전에 있는 유천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집에서 어른 걸음으로 15분 정도 걸리는 학교였는데, 입학 당일 첫 등굣길은 어머니와 함께 했다. 그날 어머니는 나에게 각종 이정표를 가리키시면서 차근차근 등굣길을 알려주셨는데, 다음날부터 쿨하게 잘 다녀와 하실 포석이셨던 것 같다. 지금 준서 생각하면 나 역시 꼬꼬마였겠지만 그래도 찻길 건너고 언덕도 오르면서 바지런히 학교 잘 다녔던 것 같다.
내 기억에 입학식 당일은 좀 추웠던 것 같다. 아이들은 다들 가슴팍에 손수건 하나씩 달고 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의아하겠지만) 코 닦는 용도였다. 그 시절에는 왜 그리 다들 코를 흘렸는지 참 미스터리다. 실제로 우리 반 용철이란 아이는 생각보다 많은 코를 흘렸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그런 용철이하고 친하게 잘 지내라고 하셨다. 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자식 뒷바라지하신다고 학교일을 많이 도우셨다. 그 해 가을, 어머니는 담임선생님을 도와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소풍을 가셨다. 당시 50명이 넘는 아이들을 담임선생님 한 분이 인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소풍이라고 해봐야 학교 근처에 있던 배재대 뒷 산 나들이였다. 학교에서 걸어서 왕복 1시간 반 정도 걸릴 거리였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담임선생님 김밥과 과일을 준비하셨다. 반 아이들은 담임선생님과 우리 어머니와 함께 즐겁게 산에 올랐다. 점심을 먹고 장기자랑을 했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을 위해 노래도 불러주셨다. 노래 부르는 장면은 눈에 선한데 그때 어떤 노래를 부르셨는지는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동요였을 것 같은데, 어머니가 나훈아 찐팬이시라 가요를 불렀을 수도 있다. 물론 둘 다 충분히 가능하신 분이다.
그 시절 어머니는 선생님에 대한 공경을 항상 강조하셨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는 말씀을 수도 없이 하셨다. 어머니는 학교에 오시면 항상 선생님께, 우리 아이는 말 안 들으면 좀 때려주세요, 라고 간청(?)하시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농담으로 알고 웃으셨지만 어머니는 진지하셨고 난 이거 여차하면 호되게 맞겠구나 하는 생각에 선생님 말씀을 정말 잘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자라왔기에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를 맞아 공경하면서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어머니가 나 몰래 아내에게, 말 안 들으면 좀 때려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말 안들을 때마다 아내 손이 움찔움찔하던데. 내일부터는 말 잘 들어야겠다.
오늘 준서 종업식에서는 부모들이 현금을 모아 아이들 단체사진 액자와 함께 기프트 카드 형태로 선생님께 선물을 드렸다. 아이들과 부모들 모두 모인 앞에서 전달해드렸는데 훈훈하고 보기에도 참 좋았다. 한국에서야 어떻게 현금을 모아서 기프트 카드를 드려, 하겠지만 미국은 그런 면에서 좀 자유로운 듯하다. 선생님 생일에 스타벅스 기프트카드도 드리고,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손 편지와 함께 작은 선물도 드린다. 심지어 두 달 축구 코치해줘서 감사하다고 나에게 던킨도너츠 기프트카드 주는 학부모도 있었다. 대형마트 기프트 카드 섹션에 한가득 쌓인 카드들이 다 쓰임새가 있는 것이었다.
난 특히 아이들 단체사진 기념액자가 너무 좋아 보여서 아내에게 한국도 저랬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좋기는 한데 한국은 어려울 거라고 했다. 돈 모으고 선물 주는 게 워낙 금기시되어서 서로 부담된다고 했다. 저건 돈보다는 마음인데, 하는 생각이 들자 내가 옛날 사람처럼 느껴졌다.
요즘 보면 미국이 은근히 정 많은, 옛날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동네 사람들 모여서 파티하고, 서로 음식 나눠먹고, 아이들 같이 모여서 놀고. 정말 유행이 돌고 도는 건가.